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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남자세례명 17가지

피어나네 2023. 10.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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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군터, 데메트리오, 데우스데디트, 돔니노, 디오니시오,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루스티코, 사비노, 아브라함, 안드로니코,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 엘레우테리오, 요한 레오나르디, 요한 헨리 뉴먼, 인노첸시오 드 라 임마쿨라다, 지슬레노, 치릴로 베르트란, 총 17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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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여자세례명 사라, 아타나시아, 푸블리아, 총 3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7가지

 

 

 

 

10월 9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군터

  2. 데메트리오

  3. 데우스데디트

  4. 돔니노

  5. 디오니시오

  6.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7. 루스티코

  8. 사비노

  9. 아브라함

  10. 안드로니코

  11.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

  12. 엘레우테리오

  13. 요한 레오나르디

  14. 요한 헨리 뉴먼

  15. 인노첸시오 드 라 임마쿨라다

  16. 지슬레노

  17. 치릴로 베르트란

 

10월 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7가지

 

 

1. 군터

 

  • 가톨릭 성인 이름
    Gunth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45년 니데랄타크

 

 

군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꾼터.

 

 

군터 자료

성 군터는 헝가리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사촌이고 성 헨리쿠스(Henricus) 황제와도 집안간이다. 따라서 그는 덕스러운 친척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났지만, 15세 때까지는 야심만만한 귀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성 고데하르두스(Godehardus)의 큰 영향을 받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희사하고는 로마(Roma)를 순례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니데랄타크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회개는 불완전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낮은 신분에 만족하지 못하고 괼딘겐의 원장이 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그는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하고 높은 덕을 쌓게 되면서부터는 스스로 낮은 신분과 은수 생활을 갈망하게 되었다. 1008년 그는 라딩 숲 속의 은둔소로 갔으나 그의 명성을 듣고 제자들이 몰려들므로 다시 바이에른(Bayern)의 린크나크로 가서 살았다. 그는 은수생활을 하면서도 문전걸식을 하였고, 남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90세를 일기로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데메트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emet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6-231년 알렉산드리아

 

 

데메트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메뜨리오, 데메뜨리우스, 데메트리우스.

 

 

데메트리오 자료

18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서임된 성 데메트리우스(또는 데메트리오)는 40년 동안 주교직에 봉직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저 유명한 교리학원을 세운 장본인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인 오리게네스(Origenes)를 이 학원의 원장으로 추대하였는데, 놀랍게도 오리게네스의 나이는 18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리게네스가 젊었을 때에는 극히 옹호하다가, 자신의 허락 없이 서품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자기 교구에서 추방해 버렸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데우스데디트

 

  • 가톨릭 성인 이름
    Deusdedi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36년 몬테카시노

 

 

데우스데디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오다또, 데오다토, 데우스데딧, 디오다또, 디오다토.

 

 

데우스데디트 자료

성 데우스데디트는 830년경에 이탈리아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수도원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한 지방 귀족에 의해 투옥되어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사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데오다토(Deodato) 또는 디오다토(Diodato)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돔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n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돔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돈니노, 돔니누스.

 

 

돔니노 자료

돈니노(Donnino)로도 불리는 성 돔니누스(또는 돔니노)는 이탈리아의 파르마(Parma)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해를 피해 탈출했으나 곧 체포되어 파르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클라우디아(Claudia) 또는 아이밀리아(Aemilia) 가도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가 순교한 장소는 오늘날 보르고 산 돈니노(Borgo San Donnino)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디오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파리

 

 

디오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자료

역사가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이탈리아 태생의 주교로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무너진 갈리아 지방의 재복음화를 위해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에 의해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주교인 ‘갈리아의 사도들’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견된 7명의 갈리아의 사도는 파리에 정착해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된 성 디오니시우스 외에 나르본의 성 바오로(Paulus, 3월 22일), 투르(Tours)의 성 가티아누스(Gatianus, 12월 18일), 툴루즈(Toulouse)의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11월 29일), 아를(Arles)의 성 트로피무스(Trophimus, 12월 29일), 클레르몽(Clermont)의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Austremonius, 11월 1일), 리모주(Limoges)의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6월 30일)가 있다.

그중에서 툴루즈의 성 사투르니누스와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파리의 초대 주교로서 자신과 동행한 성 루스티쿠스(Rusticus)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부제와 함께 몇 년 동안 활발히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파리 근교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의 수난과 순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파리 지역에서 선교 활동에 큰 성공을 거둔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이 체포된 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참수당해 그 시신이 센강(Seine R.)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다른 전승으로는 성 디오니시우스가 참수당한 후 직접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도 있다. 520년경에 출간된 “성녀 제노베파의 생애”(Vie de Sainte Genevieve)에 따르면, 이미 그 당시에 성 디오니시우스를 전례 안에서 공경하고 있었고, 성 디오니시우스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걸어갔던 곳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무덤 자리로 알려주신 곳으로 오늘날 그를 기념해 대성당이 건립된 생드니(Saint-Denis) 지역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의 순교 장소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파리 북부에 메르쿠리우스(Mercurius, Mercury) 신을 경배하던 언덕에서 참수되었는데, 그곳은 해발 129m로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순교 이후 ‘순교자의 산(언덕)’(Mons Martyrum)이란 의미를 지닌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순교 후 센강에 던져진 그들의 시신은 곧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고, 12세기에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그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건립하면서 생드니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몽마르트르 정상에는 1875년에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된 예수 성심 대성당(Sacre-Cœur Basilica)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 거리는 근대 미술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적 특성을 살려 예술의 거리로 조성되었다.

세 번째 전설은 파리의 주교였던 성 디오니시우스의 신원에 대한 혼동과 관련된 것이다. 중세 때 일부 전승은 3세기 중엽에 순교한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1세기에 아테네에서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에 의해 개종하고 후에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된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의 성 디오니시우스(사도 17,34; 10월 3일) 그리고 성 바오로가 아테네로 여행할 때 개종한 익명의 신비주의적 저술가 등 세 사람을 서로 혼동하고 있었다.

17세기까지 이런 혼동이 있었으나 이들 간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중세 때에 이들 갈리아의 일곱 사도를 사도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도적 전통과 연결하여 지역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영향에서 시작된 오해로 보인다.

실제로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9일 목록에서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사도 성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되었고, 로마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의 축복을 받고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몇 년 동안 파리에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후 성 루스티쿠스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 부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10월 9일에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동료들의 순교를, 그리고 10월 3일에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를 기념하도록 수정하여 기록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활동 시기 또한 3세기와 1세기로 명확히 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디오니시우스는 전설적 순교 이야기에 근거해 주교 복장을 하고 자신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프랑스와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성 디오니시우스는 데니스(Denis) 또는 드니(Denis)로도 불리며, 14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14명의 구난 성인’(救難 聖人, Holy Helpers) 중 한 명으로 공경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Bertran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교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26-1581년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루도비코 베르트란도 자료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에서 태어난 성 루도비쿠스 베르트란두스(Ludovicus Bertrandus, 또는 루도비코 베르트란도)는 동향 출신으로 도미니코회의 신부이자 성인품에 오른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4월 5일)가 세례받은 성당, 같은 세례대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장성하여 18세 되던 해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했고, 1547년 발렌시아의 대주교인 빌라노바(Villanova)의 성 토마스(Thomas, 9월 22일)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수련장으로 선발되어 거의 30여 년을 역임할 정도로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과 정신을 충실히 지키며 체득해나갔다.

그는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이들에게 영적 가르침을 주었다. 1557년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of Avila, 10월 15일)를 만나 그녀가 추진하는 카르멜회의 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격려했고, 그해에 페스트가 발렌시아에 만연하자 감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몸을 아끼지 않고 영웅적 구호 활동을 펼쳤다.

당시 에스파냐는 국운이 가장 강대하던 때로 신대륙에 활발히 진출했고, 여러 수도회에서도 선교사 파견에 적극적이었다. 성 루도비쿠스 베르트란두스 역시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로 나서길 간절히 원했다. 마침내 그의 뜻이 이루어져 1562년 선교사로서 라틴 아메리카의 콜롬비아로 가게 되었다.

그는 원시림을 맨발로 다니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해 수많은 원주민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또한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도록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상인들과 권력자들의 사주를 받은 괴한으로부터 수차례 공격을 받았다.

한번은 괴한이 총으로 그를 해치려 하자 십자성호를 그으니 총구 부분이 십자가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 무사할 수 있었다. 이렇듯 그의 거룩한 삶에서부터 나오는 기적과 예언 그리고 언어의 은사를 통해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했다.

1569년에 발렌시아로 돌아온 그는 여생을 오노프리우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지내며 고행과 설교에 전념하고 많은 이들의 영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는 1581년 사순절에 발렌시아 주교좌 대성당에서 설교하던 중 졸도하여 그 길로 병석에 누워 그해 10월 9일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1608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1년 4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루스티코

 

  • 가톨릭 성인 이름
    Rust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파리

 

 

루스티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스띠꼬, 루스띠꾸스, 루스티쿠스.

 

 

루스티코 자료

역사가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이탈리아 태생의 주교로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무너진 갈리아 지방의 재복음화를 위해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에 의해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주교인 ‘갈리아의 사도들’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견된 7명의 갈리아의 사도는 파리에 정착해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된 성 디오니시우스 외에 나르본의 성 바오로(Paulus, 3월 22일), 투르(Tours)의 성 가티아누스(Gatianus, 12월 18일), 툴루즈(Toulouse)의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11월 29일), 아를(Arles)의 성 트로피무스(Trophimus, 12월 29일), 클레르몽(Clermont)의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Austremonius, 11월 1일), 리모주(Limoges)의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6월 30일)가 있다.

그중에서 툴루즈의 성 사투르니누스와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파리의 초대 주교로서 자신과 동행한 성 루스티쿠스(또는 루스티코)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부제와 함께 몇 년 동안 활발히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파리 근교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의 수난과 순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파리 지역에서 선교 활동에 큰 성공을 거둔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이 체포된 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참수당해 그 시신이 센강(Seine R.)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다른 전승으로는 성 디오니시우스가 참수당한 후 직접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도 있다. 520년경에 출간된 “성녀 제노베파의 생애”(Vie de Sainte Genevieve)에 따르면, 이미 그 당시에 성 디오니시우스를 전례 안에서 공경하고 있었고, 성 디오니시우스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걸어갔던 곳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무덤 자리로 알려주신 곳으로 오늘날 그를 기념해 대성당이 건립된 생드니(Saint-Denis) 지역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의 순교 장소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파리 북부에 메르쿠리우스(Mercurius, Mercury) 신을 경배하던 언덕에서 참수되었는데, 그곳은 해발 129m로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순교 이후 ‘순교자의 산(언덕)’(Mons Martyrum)이란 의미를 지닌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순교 후 센강에 던져진 그들의 시신은 곧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고, 12세기에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그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건립하면서 생드니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몽마르트르 정상에는 1875년에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된 예수 성심 대성당(Sacre-Cœur Basilica)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 거리는 근대 미술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적 특성을 살려 예술의 거리로 조성되었다.

세 번째 전설은 파리의 주교였던 성 디오니시우스의 신원에 대한 혼동과 관련된 것이다. 중세 때 일부 전승은 3세기 중엽에 순교한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1세기에 아테네에서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에 의해 개종하고 후에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된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의 성 디오니시우스(사도 17,34; 10월 3일) 그리고 성 바오로가 아테네로 여행할 때 개종한 익명의 신비주의적 저술가 등 세 사람을 서로 혼동하고 있었다.

17세기까지 이런 혼동이 있었으나 이들 간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중세 때에 이들 갈리아의 일곱 사도를 사도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도적 전통과 연결하여 지역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영향에서 시작된 오해로 보인다.

실제로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9일 목록에서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사도 성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되었고, 로마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의 축복을 받고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몇 년 동안 파리에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후 성 루스티쿠스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 부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10월 9일에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동료들의 순교를, 그리고 10월 3일에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를 기념하도록 수정하여 기록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활동 시기 또한 3세기와 1세기로 명확히 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디오니시우스는 전설적 순교 이야기에 근거해 주교 복장을 하고 자신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프랑스와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성 디오니시우스는 데니스(Denis) 또는 드니(Denis)로도 불리며, 14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14명의 구난 성인’(救難 聖人, Holy Helpers) 중 한 명으로 공경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사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av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경? 라브당

 

 

사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비누스, 사빈, 싸비노, 싸비누스.

 

 

사비노 자료

사빈(Savin)으로도 불리는 성 사비누스(또는 사비노)는 피레네 산맥의 라브당의 사도로 공경을 받는데, 이곳은 루르드(Lourdes) 마을의 끝에 위치한다. 그는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태생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푸아티에(Poitiers)에 살던 삼촌 에우틸리우스의 보호를 받았다.

그때 사비누스는 그곳에 있던 수도자들에게 큰 감명을 받고서 집을 떠나 리구제에 있던 대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후 그는 은수자가 될 작정으로 타르브로 갔다가 다시 라브당으로 들어가서 움막을 세웠다. 그리고 인근의 농부들에게 설교했는데, 그의 회개 정신과 온화한 태도 때문에 많은 농부들이 개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성 사비누스 대수도원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아브라함

 

  • 가톨릭 성인 이름
    Abraha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브라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브람, 에이브러햄.

 

 

아브라함 자료

성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특별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유다인, 그리스도인, 무슬림 모두에게 믿음의 모범 또는 믿음의 조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셈의 후손이며 테라의 아들이고 사라이(Sharai)의 남편이며, 이사악의 아버지로서 히브리 민족의 선조이다. 그리고 아들인 이스마엘을 통해 퍼지게 된 다른 셈족의 선조이기도 하다(창세 17,5; 25,12-18). 그의 삶에 관해서는 주로 창세기(11,26-25,10)에 소개되어 있고, 사도행전 7장 2-8절에 요약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과 ‘아브라함’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언급하고 있다. 즉 창세기 11,26-17,4에서는 ‘아브람’으로, 그리고 창세기 17,5과 1역대기 1,27과 느헤미야 9,7에서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다며 함께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아브라함’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브람’은 ‘아브’(아버지)와 ‘룸’(높다, 존귀하다)에서 파생된 ‘람’의 합성어로, ‘존귀하신 아버지’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나의) 아버지는 존귀하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어원론적 해석은 불투명하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었다(창세 17,4-5).

여기에서 하느님은 약속 성취의 징표로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부여하신다. ‘아브’는 아버지를 의미하며 ‘라함’은 많은 민족을 의미하는데, 이 이름에 대한 성경의 해석은 유음 현상에 의해 만들어진 대중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칼데아의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은 아버지 테라와 동생인 나호르와 하란, 아내인 사라이 조카 롯과 함께 하란으로 이주하였다(창세 11,26-32). 아버지 테라가 죽은 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였다(12,1-5).

그가 스켐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고, 약속의 땅의 중심인 그곳에서 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다(12,6-7). 그러자 그는 제단을 쌓아 주 하느님께 바친 뒤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도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예배하였다. 그리고는 네겝 쪽으로 옮겨갔다(12,8-9). 그 후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이집트로 갔고(12,10), 다시 이집트를 떠나 네겝을 지나 베텔 쪽으로 와서(13,3) 롯을 분가시킨 다음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이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살며 주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다(13,1-18), 그 후에는 브에르 세바에 정착하였다(22,19).

아브라함에게서 분가한 조카 롯이 소돔 근처에 살고 있을 때, 소돔 지역의 왕들과 북쪽 지역의 왕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롯이 북쪽 왕들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기 위하여 북쪽 왕들과 전쟁을 벌여 조카와 그의 재물과 잡혀간 사람 모두를 구해냈는데, 여기서 그는 이미 공인된 지도자로서 행동하였다(창세 14,1-16).

그리고 이집트와 그라르와 브에르 세바에서도 한 집단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부자였고(13,2), 훈련받은 부하들도 많았다(14,14). 또 가나안족과 프리즈족과 함께 어울려 살았으며(12,6; 13,7), 오랫동안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에서도 나그네살이하였다(21,34).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히타이트 사람들과 거래를 해 막펠라의 동굴에 아내를 안장하였다(23장). 우르와 하란을 떠나기 전에 도시를 배경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은 하란에 사는 친척들이 천막생활을 한 것과는 달리 유랑하는 반유목민적 삶을 살았다(12,8-9; 13,18; 18,1).

그러나 그는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브에르 세바, 히타이트 사람들의 지역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렀으며(13,18; 18,1; 22,19; 23,3-4), 그곳 정착민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23,10-18). 이 지역 왕들과도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만큼 그는 상당한 세력을 가진 외국인 거류민이었던 것 같다(15,13; 23,4).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특별한 체험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우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들만큼 큰 민족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는데(12,1-5), 이 약속은 이미 13장 16절에서도 확인된다(“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의 실현을 위한 첫 번째 과제는 그가 아들을 얻는 것이었다. 아직 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었다. 그러던 중 환시 중에 주님의 말씀이 내렸고(15,1), 이때 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15,4-5).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믿었고, 이로써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15,6) 그리고 하느님은 그와 계약을 맺으셨다(15,7-21).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15,18)라는 말씀을 들었다. 하느님께서는 반으로 자른 희생제물을 통해 계약을 보증해 주셨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이 400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종살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15,13). 이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이것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속에서 아브라함은 초월적인 신앙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깊은 감정적 움직임이 동반된 것이었다. 이 순간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었고, 이러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믿음도 훗날 흔들리기도 했다.

그의 아내 사라이는 아직 아이가 없었으므로 당시 관습대로 남편에게 자기의 이집트인 여종인 하가르를 내어주어 아이를 갖게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가르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6세였다(16,1-16).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하셨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99세였다(창세 17,1).

이때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이며 후손을 번창하게 해줄 것을 약속하고(17,1-8), 이 새 계약의 표징으로 모든 남자의 할례를 지시하셨다(17,9-14). 이 계약과 함께 부인의 이름도 사라이에서 사라(Sara)로 바뀌었다(17,15). 이는 고대인들의 사고에 따르면 그의 운명이 바뀌는 것으로, 결국 사라가 하느님의 역사(役事)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사라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다시 확인되었다(18,1-19).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이사악이 태어났고, 이로써 약속 실현의 결정적인 조건이 갖추어졌다(21,1-7). 그러나 이사악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이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22,1-14). 모리야 땅의 산에서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내 사라가 127년을 살고 죽자 마므레 맞은쪽 막펠라에 있는 동굴에 안장(23,19)한 후 자신의 죽음도 가까이 왔음을 알고 집안의 모든 재산을 맡아보는 종에게 하란 지역에 사는 자신의 친척 중에서 이사악의 아내를 구해 주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사악의 아내로 브투엘의 딸 레베카를 맞이하였다(24장). 아브라함이 늦은 나이에 크투라를 아내로 맞아들여 얻은 자식들은 드단과 미디안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25,1-6).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리다 175세에 죽어 막펠라 동굴에 안장되었다(25,7-11).

신약성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언급되고 있다(사도 13,26). 아브라함은 사제직을 맡은 레위 지파의 선조로 언급되며(히브 7,5),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라고 선포된다(마태 1,1). 그러나 신약에서는 아브라함의 혈통과 관련하여 새로운 이해가 선포되었다.

세례자 요한과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의 복을 받는 조건이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중적 믿음을 부인하였다(마태 3,9; 로마 9,7).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가 새로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 곧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이다(1베드 2,9-10).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계약의 맹세(루카 1,73)와 약속하신 축복(갈라 3,14)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안드로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ndron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경

 

 

안드로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로니꼬, 안드로니꾸스, 안드로니쿠스.

 

 

안드로니코 자료

성 안드로니쿠스(또는 안드로니코)는 알렉산드리아 사람으로 은세공 일을 하면서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살았다. 그는 성녀 아타나시아(Athanasia)란 예쁜 처녀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며, 사업도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두 아이가 같은 날에 죽게 되면서 불행이 닥쳤다.

성녀 아타나시아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두 아이가 천상에 있다는 말을 어느 방문객으로부터 전해 들으면서부터 세상을 등지기 시작하였다. 성 안드로니쿠스도 아내의 의견에 동의하여 이 부부는 집을 떠났다. 그들은 이집트로 가서 그 당시에도 유명하던 성 다니엘(Daniel) 은수자를 찾아 나섰다.

이리하여 성 다니엘은 성 안드로니쿠스는 타벤니시(Tabennisi) 공동체로 보냈고, 성녀 아타나시아는 광야의 회수도자들에게 보냈다. 이들은 12년 동안 수도생활을 계속하였다. 후일 수도자들은 이들 부부 수도자의 유해를 합장하고 큰 성인 성녀로 공경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

 

  • 가톨릭 성인 이름
    Hector Valdivielso Sae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10-1934년 투론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데토, 베네딕도, 베네딕또, 베네딕뚜스, 베네딕토, 베네딕투스, 베네딕트, 베니토, 분도, 엑또르, 헥또르, 헥터, 헥토르.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 자료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는 1910년 10월 31일 아르헨티나(Argentina)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Nicolaus de Bari) 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그의 부모는 1914년 에스파냐로 되돌아 왔고, 그곳에서 그리스도 교육 수사회 수사들과 알고 지내던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1924년 그는 언젠가 자신이 태어난 곳에 가서 선교사로 활동할 날을 소망하며 수련기를 마치기 위해 벨기에(Belgie)로 갔다.

1926년 8월 7일 수련기에 들어가 1927년 10월 7일 첫 서원을 하며 예수의 베니토(Benito, Benedictus de Jesu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원의와는 달리 장상에 의해 1929년 8월 24일 에스파냐 아스토르가(Astorga)의 학교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1933년에 투론의 학교로 다시 파견되었다.

청소년에 대한 그의 헌신은 곧 그에게 순교의 월계관을 준비시켜 주었다. 당시 투론 지역은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에스파냐 내란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934년 10월 초 수사들은 그 달의 첫 금요일을 준비하기 위해 어린이들의 고해성사를 달라고 미에레스에 있던 예수 고난회 소속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Innocentius de la Immaculada) 신부를 청했다. 그런데 그 달 5일 새벽에 좌익 혁명군들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며칠 뒤인 8일 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Cyrillus Bertran) 교장 수사와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를 포함한 8명의 동료 수도자 그리고 고해성사를 주러 온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 신부가 아스투리아스(Asturias)의 혁명 세력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하고 끌려 나가 총살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과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를 포함한 8명의 동료 수도자 그리고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는 1990년 4월 2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11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으로는 첫 번째 성인이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에서 “순교자는 전쟁의 영웅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자이며, 그들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다”고 말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엘레우테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leuth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파리

 

 

엘레우테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레우떼리오, 엘레우떼리우스, 엘레우테리우스.

 

 

엘레우테리오 자료

역사가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이탈리아 태생의 주교로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무너진 갈리아 지방의 재복음화를 위해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에 의해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주교인 ‘갈리아의 사도들’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견된 7명의 갈리아의 사도는 파리에 정착해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된 성 디오니시우스 외에 나르본의 성 바오로(Paulus, 3월 22일), 투르(Tours)의 성 가티아누스(Gatianus, 12월 18일), 툴루즈(Toulouse)의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11월 29일), 아를(Arles)의 성 트로피무스(Trophimus, 12월 29일), 클레르몽(Clermont)의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Austremonius, 11월 1일), 리모주(Limoges)의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6월 30일)가 있다.

그중에서 툴루즈의 성 사투르니누스와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파리의 초대 주교로서 자신과 동행한 성 루스티쿠스(Rusticus)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또는 엘레우테리오) 부제와 함께 몇 년 동안 활발히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파리 근교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의 수난과 순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파리 지역에서 선교 활동에 큰 성공을 거둔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이 체포된 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참수당해 그 시신이 센강(Seine R.)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다른 전승으로는 성 디오니시우스가 참수당한 후 직접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도 있다. 520년경에 출간된 “성녀 제노베파의 생애”(Vie de Sainte Genevieve)에 따르면, 이미 그 당시에 성 디오니시우스를 전례 안에서 공경하고 있었고, 성 디오니시우스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걸어갔던 곳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무덤 자리로 알려주신 곳으로 오늘날 그를 기념해 대성당이 건립된 생드니(Saint-Denis) 지역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성 디오니시우스와 동료들의 순교 장소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파리 북부에 메르쿠리우스(Mercurius, Mercury) 신을 경배하던 언덕에서 참수되었는데, 그곳은 해발 129m로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순교 이후 ‘순교자의 산(언덕)’(Mons Martyrum)이란 의미를 지닌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순교 후 센강에 던져진 그들의 시신은 곧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고, 12세기에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그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건립하면서 생드니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몽마르트르 정상에는 1875년에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된 예수 성심 대성당(Sacre-Cœur Basilica)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 거리는 근대 미술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적 특성을 살려 예술의 거리로 조성되었다.

세 번째 전설은 파리의 주교였던 성 디오니시우스의 신원에 대한 혼동과 관련된 것이다. 중세 때 일부 전승은 3세기 중엽에 순교한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1세기에 아테네에서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에 의해 개종하고 후에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된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의 성 디오니시우스(사도 17,34; 10월 3일) 그리고 성 바오로가 아테네로 여행할 때 개종한 익명의 신비주의적 저술가 등 세 사람을 서로 혼동하고 있었다.

17세기까지 이런 혼동이 있었으나 이들 간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중세 때에 이들 갈리아의 일곱 사도를 사도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도적 전통과 연결하여 지역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영향에서 시작된 오해로 보인다.

실제로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9일 목록에서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가 사도 성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되었고, 로마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의 축복을 받고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몇 년 동안 파리에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후 성 루스티쿠스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우스 부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10월 9일에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와 동료들의 순교를, 그리고 10월 3일에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를 기념하도록 수정하여 기록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활동 시기 또한 3세기와 1세기로 명확히 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디오니시우스는 전설적 순교 이야기에 근거해 주교 복장을 하고 자신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프랑스와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성 디오니시우스는 데니스(Denis) 또는 드니(Denis)로도 불리며, 14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14명의 구난 성인’(救難 聖人, Holy Helpers) 중 한 명으로 공경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요한 레오나르디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Leonard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41-1609년

 

 

요한 레오나르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오나르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레오나르디 자료

이탈리아의 루카(Lucca) 지방의 디에치모(Diecimo)에서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성 요한 레오나르디(Joannes Leonardi)는 약학을 공부하여 약사로 여러 해 동안 일했다. 그 후 콜룸바누스회에 입회했으며, 고해사제이던 도미니코회 파올리노 베르나르디노(Paolino Bernardino)의 지도를 받아 인문학과 철학, 신학을 공부하여 1572년 12월 2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성당에 부임하여 어린이와 성인의 교리교육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병원과 감옥의 사목활동에 정열을 쏟아서 수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자 후원자들과 협력자들이 쇄도하였다.

그때 마침 트렌토(Trento) 공의회가 열리고, 프로테스탄트가 기세당당하게 활동하므로 요한과 그의 후원자들은 새로운 교구 사제회의 구성을 계획하여 프로테스탄트와 대항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1574년 9월 1일 ‘복되신 동정녀의 개혁 사제회’를 결성했다.

이 사제회는 1619년 8월 14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라 개칭되어 승인받았다. 이들은 초기에 루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도미니코 회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루카 지방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강력한 반격을 가한 요한의 사도적 열정과 개혁은 교황의 도움으로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1584년 그는 로마(Roma)에 있는 친구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를 방문하여 그의 소개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를 알현하였다. 그와 동료 사제들은 이탈리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609년 로마(Rome)에 독감이 퍼지자 요한은 독감에 걸린 14명의 동료 수도자들을 간호하던 중에 감염되어 그 해 10월 9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1861년에 시복되었고, 1938년 4월 17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요한 헨리 뉴먼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Henry Newm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추기경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1890년

 

 

요한 헨리 뉴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앙리,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존 헨리 뉴먼, 죤, 지오반니, 하인리히, 한스,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코, 헨리쿠스, 후안.

 

 

요한 헨리 뉴먼 자료

성 요한 헨리 뉴먼(Joannes Henricus Newman, 또는 존 헨리 뉴먼)은 1801년 2월 21일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Lond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성공회 신자인 부모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할머니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는 유년기와 청년기에 여러 번 열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동시에 영적인 위기와 회심도 경험하였다.

그는 7살 때 런던의 사립학교인 얼링(Ealing) 학교에 입학했고, 15살이 된 1816년 금융업자인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움으로 겪던 중 열병이 발병해 5개월 정도 큰 고생을 하였다.

그때 그는 복음주의 성직자인 메이어즈(Walter Mayers)의 도움으로 여러 신앙 서적을 읽으며 당시 영국 사상계를 지배하던 무신론으로 이끄는 회의주의나 과학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817년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옥스퍼드대학교를 구성하는 트리니티대학(Trinity College)에 입학해 수학하고, 1822년 오리엘대학(Oriel College)에서 평의회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1824년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사제품을 받아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그는 1826년 오리엘대학 교수가 되었고, 1828년에는 오리엘대학 안에 있는 성 마리아 성당의 주임신부가 되었다. 1829년 성공회 고교회파에 속한 허렐 프루드(Hurrell Froude) 신부와 친구가 되면서 저교회파 배경에서 성장한 그는 가톨릭 신앙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9세기 영국 성공회에는 고교회파(High Church)와 저교회파(Low Church)가 있었는데, 고교회파는 고대 그리스도교로부터 내려오는 사도 전승을 따르며 교회의 권위 및 전례와 성사를 강조하면서 가톨릭교회와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저교회파는 교회의 권위와 성사성(聖事性)을 낮게 평가하면서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개신교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1832년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친구인 프루드 신부가 요양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지중해로 떠날 때 동행하면서 처음으로 영국 땅을 벗어나 로마를 포함해 실제로 가톨릭의 세계와 문화를 만나볼 기회를 얻었다.

그는 프루드 신부 일행이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지방을 여행하였고,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히고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833년부터 성공회의 쇄신과 부흥을 주장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 1833-1841)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16년 성공회 사제가 된 고교회파 소속 존 키블(John Keble, 1792-1866)은 옥스퍼드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부가 교회 활동과 교회의 재산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정치 · 사회적 운동을 전개했는데,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연구하면서 신학적 · 사목적 관점으로 점차 전환하였다.

그는 1833년부터 성 요한 헨리 뉴먼과 함께 영국 성공회의 쇄신과 탈국교화(脫國敎化)를 주장하며 고대와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과 전례를 연구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꾸준히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로 인해 ‘옥스퍼드 운동’은 ‘소책자 운동’(Tractarianism)이라고도 불렸고,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은 ‘소책자 운동가들’(Tractarians)로 불렸다.

소논문집인 이 소책자는 90호까지 이어졌고, 1841년에 발간된 90호에서 성 요한 헨리 뉴먼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결정했던 사항들이 영국 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일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공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와 성공회 주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1842년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리틀모어(Littlemore)라는 작은 마을로 물러나 준(準) 수도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다.

1845년 10월 6일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에 관한 논고”의 집필을 끝낸 후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결심하고, 3일 후에 리틀모어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동료들과 함께 예수 고난회의 복자 도미니코 바르베리(Dominicus Barberi, 8월 27일) 신부의 도움으로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개종 후 그는 1846년 리틀모어를 떠나 교황 대리감목이 있던 버밍엄(Birmingham)으로 갔다. 이곳에서 아일랜드 출신 니콜라스 와이즈먼(Nicholas Wiseman, 1802-1865) 신부의 권유로 가톨릭교회의 사제가 되기로 한 그는, 그해 10월 로마로 가서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복음화성) 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신학 강의를 청강하고,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한 그는 1847년 5월 30일 사제품을 받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성 요한 헨리 뉴먼 신부는 1848년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의 정신을 따라 버밍엄에 영국 오라토리오회(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50년 비로소 영국에서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가 복원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국 성공회 신자들의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대한 반감도 더욱 드세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니콜라스 와이즈먼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영국 언론은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 복원을 교황청의 침략이라고 비난했고, 성공회 신자들도 교황과 추기경의 형상을 만들어 불태우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신문지면 등을 통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박과 변론을 기고하면서 가톨릭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는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에 신설된 가톨릭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학 설립 허가가 나오지 않아 아일랜드 주교단에 사의를 표명하고 1858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출판물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에게 유익한 글과 작품을 남겼다.

1864년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과 특히 성 요한 헨리 뉴먼을 겨냥해서 그의 도덕과 사상은 진리가 담겨 있지 않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공격하자 그는 자신과 다른 성직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적 변천 과정을 담은 “나의 생애를 위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여기서 그는 솔직하고 공정한 내용으로 영국의 일부 가톨릭 신자들과 성공회 신자들이 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던 의혹과 오해를 말끔히 씻어냈고, 영국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그의 중요한 위상이 다시금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1869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 2월 7일)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300여 년 만에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 성 요한 헨리 뉴먼을 초대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성대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낯설어한 그는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 버밍엄의 오라토리오회에 계속 머물렀다.

그는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이 신앙 교리로 선포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의회가 이를 선포하면 제일 먼저 승복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1879년 성 요한 헨리 뉴먼이 주교도 아니고 로마에 머물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업적을 인정하였다. 78세의 성 요한 헨리 뉴먼은 허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가서 추기경의 영예를 받고 버밍엄으로 돌아와 여생을 오라토리오회의 수도원에서 보내다가 1890년 8월 11일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그는 2010년 9월 19일 영국을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잉글랜드 버밍엄에서 시복되었고, 2019년 10월 13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이 성녀 클라라 축일과 중복되는 관계로 오라토리오회와 잉글랜드와 웨일즈 가톨릭 주교회의는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10월 9일을 축일로 정해 경축하고 있다.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가교역할을 담당하면서 두 교회가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양측 신자들이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이바지하였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찾고자 노력했던 그는 교회쇄신을 위한 개혁적 사상과 참된 교회일치운동의 모범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중요한 사상적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공의회의 ‘숨겨진 교부’라는 평가를 받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인노첸시오 드 라 임마쿨라다

 

  • 가톨릭 성인 이름
    Innocent de la Immaculad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7-1934년 투론

 

 

인노첸시오 드 라 임마쿨라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누엘, 아르나우,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임마꿀라다, 임마쿨라타, 임미꿀라따, 카노우라.

 

 

인노첸시오 드 라 임마쿨라다 자료

1887년 3월 10일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지방 루고(Lugo)에서 태어난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Innocentius de la Immaculada, 또는 인노첸시오 드 라 임마쿨라다)는 14살 때 바야돌리드(Valladolid) 근방에 있는 예수 고난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데우스토(Deusto)에서 수련기를 마치고 계속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투론에서 머지않은 미에레스(Mieres)에서 부제품을 받고 1920년 사제가 되었다. 사제가 된 후 그는 여러 마을에서 설교자와 교사로서의 성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1934년 10월 초 미에레스에 있던 그에게 투론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그리스도의 교육 수사회의 수도자들이 그 달의 첫 금요일을 준비하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고해성사를 달라고 그를 청했다. 그런데 그 달 5일 새벽에 좌익 혁명군들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당시 에스파냐는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내란으로 인해 혼란한 상태였고 투론은 그 중심지였다. 며칠 뒤인 8일 밤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 신부와 그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던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Cyrillus Bertran) 수사와 8명의 동료 수도자들은 아스투리아스(Asturias)의 혁명 세력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하고 끌려 나가 총살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들은 모두 1990년 4월 2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11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는 마누엘 카노우라 아르나우(Manuel Canoura Arnau)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지슬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isle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수도승

  • 활동 연도와 지역
    +680년경

 

 

지슬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기슬레노, 기슬레누스, 지슬레누스.

 

 

지슬레노 자료

성 기슬레누스(또는 지슬레노)는 벨기에 에노(Hainaut) 지방의 숲 속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성 베드로(Petrus)와 바오로(Paulus)에게 봉헌한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으로서 매우 지혜롭고 덕스럽게 다스렸다. 또한 그는 성 빈첸시오 마델가리우스(Vincentius Madelgarius, 9월 20일)와 그의 아내인 성녀 발데트루다(Waldetrudis, 4월 9일)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그들로 하여금 카스트릴로코에 수도원을 세우게 하였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그는 은수자가 되기 전에 주교로 있었으나 곧 사임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 반도의 아티카(Attika) 태생으로 그곳에서 은수자가 되었다가 아테네(Athenae) 주교좌를 설립하였으나, 어떤 환시를 본 뒤에 그 직을 사임하고 로마(Roma)를 순례한 뒤에 에노로 가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성 아만두스(Amandus, 2월 6일)를 만났고, 하인느 강변에 은둔소를 마련하고 높은 성덕을 쌓았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치릴로 베르트란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l Bertr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7-1934년 투론

 

 

치릴로 베르트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르트란도, 베르트란두스, 베르트랑, 산스, 산즈,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테헤도르, 호세.

 

 

치릴로 베르트란 자료

1888년 3월 20일 에스파냐 부르고스(Burgos) 지방의 레르마(Lerma)에서 태어난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Cyrillus Bertran, 또는 성 치릴로 베르트란)은 1905년 7월 12일 그리스도 교육 수사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용기와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비범한 지혜와 신중함을 통해 자신의 영성생활과 사도적 열정의 조화를 이루어 갔는데, 이는 장상의 신뢰를 가져와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학교의 교장을 거쳐 1933년 투론에 있는 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그 자리는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에스파냐 내란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934년 10월 초 그는 그 달의 첫 금요일을 준비하기 위해 어린이들의 고해성사를 달라고 미에레스에 있던 예수 고난회 소속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Innocentius de la Immaculada) 신부를 청했다.

그런데 그 달 5일 새벽에 좌익 혁명군들이 학교에 들이닥쳤고, 며칠 뒤인 8일 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과 8명의 동료 수도자 그리고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 신부가 아스투리아스(Asturias)의 혁명 세력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하고 끌려 나가 총살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과 8명의 동료 수도자 그리고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는 1990년 4월 2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11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은 키릴루스 베르트란두스(Cyrillus Bertrandus) 또는 호세 산스 테헤도르(Jose Sanz Tejedo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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