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니콜라오, 다니엘, 다니엘 콤보니, 돔노, 레오, 마아르사포르, 말로소, 바울리노 (이탈리아 카푸아), 바울리노 (영국 요크), 빅토르, 사무엘, 안젤로, 에우람피오, 제레온,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포풀로니아),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베로나), 카시오, 플로렌시오, 피니토, 후골리노, 총 20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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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1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0가지
10월 10일 남자세례명 목록
- 니콜라오
- 다니엘
- 다니엘 콤보니
- 돔노
- 레오
- 마아르사포르
- 말로소
- 바울리노 (이탈리아 카푸아)
- 바울리노 (영국 요크)
- 빅토르
- 사무엘
- 안젤로
- 에우람피오
- 제레온
-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포풀로니아)
-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베로나)
- 카시오
- 플로렌시오
- 피니토
- 후골리노
1. 니콜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니콜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자료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Daniel)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다니엘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다니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자료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다니엘 콤보니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Combon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설립자,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831-1881년 아프리카
다니엘 콤보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꼼보니, 다니엘레, 대니얼.
다니엘 콤보니 자료
1931년 3월 15일 북부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 근처 가르다(Garda) 호숫가의 리모네 산 조반니(Limone San Giovanni)에서 출생한 성 다니엘 콤보니는 농부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여덟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교구 신학교를 다닌 후 베로나(Verona)에 있는 마차(Mazza) 신부의 선교사 양성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를 하겠다는 뜻을 품고 신학 외에도 몇 가지 외국어와 의학을 공부하였다. 1857년 수단 선교를 위한 탐험대와 함께 중앙아프리카로 파견된 그는 나일 강 상류 지방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여건과 적대적인 환경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에 세 명의 신부가 사망하였다. 그래서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은 이 지방의 선교를 포기하고 성 다니엘 신부와 동료들을 이탈리아로 귀환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마차 신부의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64년 ‘아프리카인들을 통해서 아프리카를 구원하자’는 선교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유럽인들이 해안선을 따라 선교지를 구축하고 그곳에서 아프리카인들을 교육시켜 내륙으로 파견하자는 계획이었다.
1867년 그는 교황의 허가를 얻어 베로나 사제회(Verona Fathers)라고도 불리는 콤보니의 예수 성심 선교회를 설립하고, 이집트의 카이로에 아프리카인 남성과 여성을 위한 두 개의 학교를 세웠다. 모금을 위한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1872년에 베로나 수녀회(Verona Sisters)라고도 불리는 니그리지아 신심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 성 콤보니 신부는 수단, 누비아 그리고 큰 호수들의 남쪽 영토들을 포함하며 이집트부터 짐바브웨까지, 그리고 홍해부터 말리까지를 관장하는 중앙아프리카 대목구의 부대목에 임명되었고 1877년에는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선교지 확보와 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헌신하다가 1881년 7월 말라리아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간 계속 일을 하다가 결국 그해 10월 10일 하르툼(Khartoum)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96년 3월 17일에 그를 복자품에 올렸으며, 2003년 10월 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돔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돔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돔누스.
돔노 자료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또는 돔노),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Daniel)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e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레오 자료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Daniel)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마아르사포르
- 가톨릭 성인 이름
Maharsap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21년 페르시아
마아르사포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아르사뽀르, 마하르사뽀르, 마하르사포르.
마아르사포르 자료
페르시아 귀족이던 성 마아르사포르는 마르딘 신전 파괴 사건으로 일어난 에스디게르드 왕의 박해 때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나르세스(Narses)와 사부타카(Sabutaka)와 함께 고문을 받았으나, 이 두 사람은 노예로 팔려갔다.
그는 캄캄한 지하 감방에서 3년을 옥살이 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므로 굶어 죽었다고 한다. 얼마 후에 관리들이 문을 열어보니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운명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말로소
- 가톨릭 성인 이름
Mallo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크산텐
말로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말로수스.
말로소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성 빅토르(Victor)가 독일의 쾰른(Koln)과 인접한 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기록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 쾰른 지역의 크산텐에 속한 비르텐(Birten)에서 성 빅토르와 성 말로수스(또는 말로소)가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반란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우상에게 희생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9월 22일) 등과 함께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 또는 장크트 모리츠 Sankt Moritz)에서 무참히 살해된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군인들이었다.
일부 군인이 아가우눔을 탈출했으나 추격병에게 붙잡혀 졸로투른(Solothurn)에서 또는 크산텐 인근의 비르텐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성 빅토르와 성 말로수스도 그 전설의 연장선 위에 있다. 성 빅토르는 라인강(Rhein River) 하구 크산텐의 원형경기장에서 순교했다고 하고, 성녀 베레나(Verena, 9월 1일)의 친척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확인은 어렵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바울리노 (이탈리아 카푸아)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43년 카푸아
바울리노 (이탈리아 카푸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바울리노 (이탈리아 카푸아) 자료
전승에 의하면 영국에서 태어난 성 바울리누스(또는 바울리노)는 예루살렘(Jerusalem)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탈리아의 카푸아에 잠시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그 지방 사람들에 의해 거의 강제적으로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가 주교직에 있던 때는 사라센족의 침략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카푸아가 사라센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그는 그 도시를 빠져나가 시코폴리스(Sicopolis)에서 사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바울리노 (영국 요크)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644년 요크
바울리노 (영국 요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바울리노 (영국 요크) 자료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파견한 잉글랜드(England) 선교사의 일원인 성 바울리누스(또는 바울리노)는 주로 켄트(Kent)에서 활동하던 중 625년에 주교가 되었다.
그는 켄트의 성 에텔베르트(Ethelbert, 2월 26일) 왕의 딸인 성녀 에텔부르가(Ethelburga, 4월 5일)를 수행하여 노섬브리아(Northumbria)로 갔고, 2년 뒤의 부활절에는 요크 주교좌에서 성 에드윈(Edwin, 10월 12일)을 개종시킴으로써 노섬브리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하게 되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수천 명을 개종시켰고, 왕의 뒤를 이어 개종한 이들이 연일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왕 성 에드윈이 이방인 머시아(Mercia) 사람들에게 살해되자 노섬브리아는 다시금 이교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로체스터(Rochester)의 주교로 봉직하다가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빅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크산텐
빅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성 빅토르가 독일의 쾰른(Koln)과 인접한 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기록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 쾰른 지역의 크산텐에 속한 비르텐(Birten)에서 성 빅토르와 성 말로수스(Mallosus)가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반란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우상에게 희생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9월 22일) 등과 함께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 또는 장크트 모리츠 Sankt Moritz)에서 무참히 살해된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군인들이었다.
일부 군인이 아가우눔을 탈출했으나 추격병에게 붙잡혀 졸로투른(Solothurn)에서 또는 크산텐 인근의 비르텐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성 빅토르와 성 말로수스도 그 전설의 연장선 위에 있다. 성 빅토르는 라인강(Rhein River) 하구 크산텐의 원형경기장에서 순교했다고 하고, 성녀 베레나(Verena, 9월 1일)의 친척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확인은 어렵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사무엘
- 가톨릭 성인 이름
Samue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사무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뮈엘, 새무얼, 싸무엘.
사무엘 자료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Daniel)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안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nge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안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겔로, 안겔루스, 안젤루스, 앤젤러스, 엔젤러스.
안젤로 자료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또는 안젤로),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Daniel)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에우람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lamp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에우람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람피우스, 에울람피오, 에울람피우스.
에우람피오 자료
성 에우람피우스(또는 에우람피오)와 성녀 에우람피아(Eulampia)는 남매 사이로 오늘날 튀르키예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옛 이름)의 니코메디아(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즈미트 Izmit) 출신이다.
옛 “로마 순교록”과 전승에 따르면, 막시밀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박해가 심해지자 많은 그리스도인이 집을 떠나 인적이 드문 산속 동굴이나 사막으로 피신하였다.
하루는 그들 중에서 젊은이였던 성 에우람피우스가 동료들이 먹을 빵을 사기 위해 도시로 가게 되었다. 그는 성문 앞에 그리스도교를 금지하는 포고문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웃으며 떼어 찢어버리다가 체포되었다. 다른 전승에서는 빵을 사서 모으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재판관 앞으로 끌려가 이교도의 신상 앞에 희생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심한 매질과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성녀 에우람피아는 자기 오빠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을 헤치고 들어가 오빠를 껴안고 울부짖었다.
결국 그녀 또한 체포되어 남매가 함께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졌지만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중과 군인들이 오히려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이들 남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200여 명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비티니아의 니코메디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한 성 에우람피우스와 그의 여동생인 성녀 에우람피아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제레온
- 가톨릭 성인 이름
Gere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쾰른
제레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레온.
제레온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게레온(또는 제레온)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독일의 쾰른에서 318명의 동료와 함께 참된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을 박해자의 칼 아래 용맹하게 내어놓은 순교자이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성 게레온과 동료들은 아가우눔(Agaunum)에서 순교한 테반 군단(Theban Legion)에 속했던 군인들로 쾰른에서 순교했다고 하나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크산텐 출신의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6월 6일)가 환시를 통해 성녀 우르술라(Ursula, 10월 21일)와 동료들 그리고 성 게레온과 동료들의 유해가 있는 곳을 발견했고, 성 게레온의 순교를 기념해 1151년에 건축을 시작해 1227년에 완공한 성 게레온 대성당이 쾰른에 남아 있을 뿐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독일의 쾰른에서 참된 신앙을 위해 용기 있게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성 게레온과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한다고 짧게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보통 로마 군인이나 중세 기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포풀로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Cerbo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75년경 포풀로니아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포풀로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체르보니우스, 케르보니오, 케르보니우스.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포풀로니아) 자료
성 케르보니우스(또는 체르보니오)는 전승에 따르면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사제품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아리우스파에 속한 반달족(Vandals)의 박해를 피해 성 레굴루스(Regulus, 9월 1일)와 동료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탈출했는데,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 상륙해 은수자로 살았다.
그러던 중 해안가의 고대 도시인 포풀로니아(오늘날의 피옴비노 Piombino 항구 도시의 일부)에 갔다가 그곳의 주교가 선종한 후 성직자와 시민들의 요청으로 주교직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고트족(Ostrogoths)의 토틸라(Totila) 왕의 군대로부터 로마 병사 몇 명을 숨겨준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원형경기장에서 사나운 곰에게 던져지는 형을 받았지만 곰이 전혀 그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발을 핥았다고 한다. 이에 관중들이 깊은 인상을 받았고, 결국 토틸라는 그를 석방하였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는 그의 저서 “대화집”에서 성 케르보니우스에 대해 전해주며 그의 높은 덕을 칭송하였다. 그에 따르면 성 케르보니우스 주교는 랑고바르드족(Langobards)이 침공하는 동안 토스카나 제도의 엘바섬(Elba Is.)으로 피해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은수자로 살면서 수많은 덕행의 모범을 보였고, 많은 기적도 행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포풀로니아에 묻어달라고 했다. 그가 선종한 후 신자들은 즉시 그의 시신을 배에 싣고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기적적으로 건너 포풀로니아에 도착해 그의 시신을 묻고 생전에 주교가 이야기한 대로 즉시 배를 타고 엘바섬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랑고바드르 왕국의 왕이 포풀로니아를 점령했고, 엘바섬으로 돌아간 이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0월 10일 목록에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의 증언을 중심으로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로마(Roma)로 소환되는 중에 거위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동물과 동행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보통 거위와 함께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베로나)
- 가톨릭 성인 이름
Cerbo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00년경 베로나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베로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체르보니우스, 케르보니오, 케르보니우스.
체르보니오 (이탈리아 베로나)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의 주교인 성 케르보니우스(또는 체르보니오)의 이름을 전해주었으나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의 이름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s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본
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시오, 가시우스, 까씨오, 까씨우스, 카시우스.
카시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독일의 쾰른(Koln) 동남쪽에 있는 본에서 성 카시우스(또는 카시오)와 성 플로렌티우스(Florentius)와 많은 동료가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부 이집트(Upper Egypt)의 룩소르(Luxor) 인근 테베(Thebes)에서 모집된 군인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으로서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9월 22일)의 지휘 아래 알프스를 넘어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 또는 장크트 모리츠 Sankt Moritz)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물 바치라는 황제의 명을 거부하고 학살당한 테반 군단의 일부가 아가우눔을 탈출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스위스의 졸로투른(Solothurn)에서, 독일의 쾰른(Koln)과 크산텐(Xanten)과 본에서 체포되어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독일 본에서 성 카시우스와 성 플로렌티우스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4세기 말에 성 카시우스와 성 플로렌티우스와 동료들의 무덤 위에 성당에 세워졌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수도원과 중세도시가 형성되었다. 11세기에 기존의 성당을 헐면서 발굴된 세 개의 석관 안에서 발견된 두 성인과 다른 순교자의 유해는 새로 건립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주교좌성당 지하에 모셨다.
본의 주교좌성당은 성 카시우스와 성 플로렌티우스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다. 16세기 후반 전쟁 중에 성당의 많은 보물과 유해가 약탈당했는데, 다행히 성인들의 유해를 보존할 수 있었다. 1643년에 두 성인은 본이란 도시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 뒤로도 나폴레옹의 점령 이후 제단이 해체되면서 사라진 유해가 19세기 말 성당을 복원하던 중 성가대석 천장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리고 1971년 성인들의 유해를 모신 지하 묘지 경당이 본 주교좌성당 안에 새로 건립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들은 보통 테반 군단의 일원인 군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플로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Flor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본
플로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로렌시우스, 플로렌씨오, 플로렌씨우스, 플로렌티오, 플로렌티우스.
플로렌시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독일의 쾰른(Koln) 동남쪽에 있는 본에서 성 카시우스(Cassius)와 성 플로렌티우스(또는 플로렌시오)와 많은 동료가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부 이집트(Upper Egypt)의 룩소르(Luxor) 인근 테베(Thebes)에서 모집된 군인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으로서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9월 22일)의 지휘 아래 알프스를 넘어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 또는 장크트 모리츠 Sankt Moritz)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물 바치라는 황제의 명을 거부하고 학살당한 테반 군단의 일부가 아가우눔을 탈출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스위스의 졸로투른(Solothurn)에서, 독일의 쾰른(Koln)과 크산텐(Xanten)과 본에서 체포되어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독일 본에서 성 카시우스와 성 플로렌티우스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4세기 말에 성 카시우스와 성 플로렌티우스와 동료들의 무덤 위에 성당에 세워졌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수도원과 중세도시가 형성되었다. 11세기에 기존의 성당을 헐면서 발굴된 세 개의 석관 안에서 발견된 두 성인과 다른 순교자의 유해는 새로 건립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주교좌성당 지하에 모셨다.
본의 주교좌성당은 성 카시우스와 성 플로렌티우스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다. 16세기 후반 전쟁 중에 성당의 많은 보물과 유해가 약탈당했는데, 다행히 성인들의 유해를 보존할 수 있었다. 1643년에 두 성인은 본이란 도시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 뒤로도 나폴레옹의 점령 이후 제단이 해체되면서 사라진 유해가 19세기 말 성당을 복원하던 중 성가대석 천장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리고 1971년 성인들의 유해를 모신 지하 묘지 경당이 본 주교좌성당 안에 새로 건립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들은 보통 테반 군단의 일원인 군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피니토
- 가톨릭 성인 이름
Piny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년경 크노소스
피니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삐니또, 삐니뚜스, 피니또, 피니뚜스, 피니투스.
피니토 자료
성 피니투스(또는 피니토)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지만, 그는 그리스 태생으로 크레타섬(Creta Is) 북중부 해안가의 고대 도시인 크노소스의 주교였다.
카이사레아(Caesarea)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그를 매우 존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를 당대 최고의 교회 저술가 중 한 명으로 묘사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0월 10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기록하며,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베루스(Marcus Antoninus Verus) 황제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Lucius Aurelius Commodus) 황제 때 저술을 통해 그에게 맡겨진 양 떼의 신앙과 영적 성장에 최상의 도움을 제공한 크레타섬 크노소스의 주교인 성 피니투스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후골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Hugo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후골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후골리누스.
후골리노 자료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 후골리누스(또는 후골리노)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Daniel)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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