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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남자세례명 21가지

피어나네 2023. 10.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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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굼마로, 니카시오, 마인하르트, 브루노, 사르마타, 스쿠비쿨로, 아길베르토, 아나스타시오, 안드로니코, 알렉산데르 사울리, 요한 23세, 제네시오, 제르마노, 카니코, 퀴리노, 타라코, 프로보, 플라치도, 플라치디아, 피르미노, 필립보, 총 21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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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여자세례명 마리아 솔레다드, 에텔부르가, 제나이스, 피엔티아, 필로닐라, 총 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1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1가지

 

 

 

 

10월 1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굼마로

  2. 니카시오

  3. 마인하르트

  4. 브루노

  5. 사르마타

  6. 스쿠비쿨로

  7. 아길베르토

  8. 아나스타시오

  9. 안드로니코

  10. 알렉산데르 사울리

  11. 요한 23세

  12. 제네시오

  13. 제르마노

  14. 카니코

  15. 퀴리노

  16. 타라코

  17. 프로보

  18. 플라치도

  19. 플라치디아

  20. 피르미노

  21. 필립보

 

10월 1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1가지

 

 

1. 굼마로

 

  • 가톨릭 성인 이름
    Gumma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74년경 리에르

 

 

굼마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굼마루스.

 

 

굼마로 자료

성 굼바루스(또는 굼마로)는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 지방 리에르의 영주 아들이었으나, 읽고 쓰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 자라나 피핀 왕의 궁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심은 뛰어나서 모든 일에 충실함은 물론 자선활동에 전념하였다.

왕은 그를 귀히 여기고 높은 지위에 올리고, 귀니마리아(Gwinmarie)라는 여인과 성대한 결혼식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깡마르고 성격이 잔인하였으므로 그는 아내의 모든 행위를 단련의 기회로 여기고 일생을 같이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아내를 통하여 높은 성덕을 닦았던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니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ic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니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까시오, 니까시우스, 니카시우스.

 

 

니카시오 자료

성 니카시우스(또는 니카시오)는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일찍이 1세기에 갈리아(Gallia) 지방 복음화를 위해 로마에서 파견한 첫 번째 선교사 중 한 명과 연관 짓고 있다. 반면 또 다른 전승에서는 성 니카시우스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루앙(Rouen)으로 순례하던 중 신앙 때문에 살해된 주교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는 루앙에 머물거나 그곳에서 선교하지는 않았고, 주로 파리와 루앙 사이에 있는 벡생(Vexin)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전개해 ‘벡생의 사도’로 불리고 있다.

게다가 루앙 교구의 주교단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도 종종 루앙의 초대 주교로 언급되고 있고, 실제 루앙의 초대 주교로 더 많이 알려진 성 멜라니우스(Melanius, 10월 22일)의 스승으로서 그에게 주교좌를 물려주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1일 목록에서 페세니누스(Fescenninus) 총독 시절에 벡생에서 루앙의 주교인 성 니카시우스와 성 퀴리누스(Quirinus) 신부와 성 스쿠비쿨루스(Scubiculus) 부제 그리고 동정녀인 성녀 피엔티아(Pientia)가 순교했다고 그들의 이름과 신분을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 프랑스에 속한 벡생 지역에서 성 니카시우스와 성 퀴리누스와 성 스쿠비쿨루스와 성녀 피엔티아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간단히 이름만 기록하였다.

성 니카시우스는 종종 랭스(Reims)의 주교인 성 니카시우스(12월 14일)와 같은 인물로 혼동되기도 하는데, 그런 이유로 교회 미술에서 랭스의 성 니카시우스가 참수된 후 자기 머리를 들고 무덤으로 갔다는 이야기대로 자기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그리고 성 퀴리누스의 유물은 875년경 샤를 2세(Charles le Chauve) 때 벨기에의 리에주(Liege) 남동쪽에 있는 말메디(Malmedy) 수도원으로 옮겨져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인하르트

 

  • 가톨릭 성인 이름
    Meinh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34/6-1196년 리보니아

 

 

마인하르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인아르도, 메인아르두스, 메인하드, 메인하르도, 메인하르두스.

 

 

마인하르트 자료

성 마인하르트는 독일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의 세게베르크(Segeberg)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일생을 슬라브족 선교에 헌신한 올덴부르크(Oldenburg)의 성 비켈리누스(Vicelinus, 12월 12일)가 세운 이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성인의 삶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사제로 서품된 후 그는 당시 이교도 지역이었던 리보니아로 가는 상인들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 오늘날의 라트비아(Latvia) 지역에 사는 세미갈리아와 라트갈리아 그리고 리보니아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선교 사업에 주력하였다.

그는 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 남동쪽 다우가바(Daugava) 강변의 이케스코라(Ykescola)에 정착했다. 1185-1186년에 그는 석조 성당을 지어 동정 성모님께 봉헌했다. 그런데 리투아니아인들의 공격이 계속되자 고틀란드(Gotland) 섬에서 석공들을 데려와 미래의 침략에 대비해 요새를 건설하였다.

이 건축물들은 발트 해 연안에 사는 종족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알려진 석조 건축물이었다. 그는 최근에 개종한 이교도들을 위한 선물로 살라스필스(Salaspils)에 또 다른 석조 성(城)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 마인하르트는 리보니아를 떠나게 되었다.

1186년 잠시 독일로 돌아온 그는 브레멘(Bremen)의 대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리보니아의 초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주교직을 승인한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는 1190년 일단의 수도자들이 성 마인하르트의 선교 사업에 동참하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성 마인하르트 주교를 도와 리보니아에서 방인사제를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클레멘스 3세를 뒤이은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 역시 그의 서한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성 마인하르트의 선교 사업에 대한 헌신과 노고를 높이 평가하였다.

성 마인하르트는 1196년 8월 14일 또는 10월 11일 리보니아의 성에서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다. 그 후 13세기에 그의 유해는 리가 대성당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존재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선교사제로서 그의 성덕을 언급하면서 재조명되었다. 그리고 1993년 9월 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그는 메인아르두스(Meinard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브루노

 

  • 가톨릭 성인 이름
    Brun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925-965년 쾰른

 

 

브루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브루노 자료

새 사냥꾼 하인리히(Heinrich) 황제와 성녀 마틸다(Matilda, 3월 14일)의 막내아들인 성 브루노는 4살 때 위트레흐트(Utrecht)의 주교좌 학교로 보내졌고, 14세에 황궁으로 돌아왔으며, 940년에 그의 형인 오토 1세 황제의 개인비서가 되었다가 95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불과 3년 뒤에는 쾰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여기서 성 판탈레온(Pantaleon) 수도원을 세웠고, 엄격한 교회 규율을 제정하여 수도원과 교구의 개혁에 헌신하였고 학문 진흥을 꽤하였다. 그리고 오토 황제가 로마(Roma)로 가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동안에 황제의 섭정도 맡았다. 그는 프랑스의 랭스(Reims)에서 운명하였고, 1870년에 그의 공경이 허락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사르마타

 

  • 가톨릭 성인 이름
    Sarmat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57년 이집트

 

 

사르마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르마따.

 

 

사르마타 자료

“로마 순교록”은 10월 11일 목록에서 사막의 성자이자 이집트 테바이드(Thebaid) 지방의 수도원장인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의 제자인 성 사르마타가 사라센족(Saracens)에 의해 살해되어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스쿠비쿨로

 

  • 가톨릭 성인 이름
    Scubicu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스쿠비쿨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꾸비꿀로, 스꾸비꿀루스, 스쿠비쿨루스.

 

 

스쿠비쿨로 자료

성 니카시우스(Nicasius)는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일찍이 1세기에 갈리아(Gallia) 지방 복음화를 위해 로마에서 파견한 첫 번째 선교사 중 한 명과 연관 짓고 있다. 반면 또 다른 전승에서는 성 니카시우스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루앙(Rouen)으로 순례하던 중 신앙 때문에 살해된 주교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는 루앙에 머물거나 그곳에서 선교하지는 않았고, 주로 파리와 루앙 사이에 있는 벡생(Vexin)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전개해 ‘벡생의 사도’로 불리고 있다.

게다가 루앙 교구의 주교단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도 종종 루앙의 초대 주교로 언급되고 있고, 실제 루앙의 초대 주교로 더 많이 알려진 성 멜라니우스(Melanius, 10월 22일)의 스승으로서 그에게 주교좌를 물려주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1일 목록에서 페세니누스(Fescenninus) 총독 시절에 벡생에서 루앙의 주교인 성 니카시우스와 성 퀴리누스(Quirinus) 신부와 성 스쿠비쿨루스(또는 스쿠비쿨로) 부제 그리고 동정녀인 성녀 피엔티아(Pientia)가 순교했다고 그들의 이름과 신분을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 프랑스에 속한 벡생 지역에서 성 니카시우스와 성 퀴리누스와 성 스쿠비쿨루스와 성녀 피엔티아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간단히 이름만 기록하였다.

성 니카시우스는 종종 랭스(Reims)의 주교인 성 니카시우스(12월 14일)와 같은 인물로 혼동되기도 하는데, 그런 이유로 교회 미술에서 랭스의 성 니카시우스가 참수된 후 자기 머리를 들고 무덤으로 갔다는 이야기대로 자기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그리고 성 퀴리누스의 유물은 875년경 샤를 2세(Charles le Chauve) 때 벨기에의 리에주(Liege) 남동쪽에 있는 말메디(Malmedy) 수도원으로 옮겨져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아길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gil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85년 리

 

 

아길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길베르투스, 아길베르트, 아질베르또, 아질베르뚜스, 아질베르토, 아질베르투스, 아질베르트.

 

 

아길베르토 자료

성 아길베르투스(Agilbertus, 또는 아길베르토)는 아일랜드의 주아르(Jouarre) 수도원에서 아도 원장 문하에서 공부한 프랑크인 주교였다. 그는 웨식스(Wessex)의 코웬왈(Coenwalh) 왕의 초청으로 웨식스의 주교로도 봉직하였다.

그는 선교 활동에 매우 적극성을 띠었고, 성 발프리두스(Walfridus)를 서품하였으며 그와 함께 휘트비 시노드(Synod of Whitby)에서 로마(Roma)와 더불어 켈트(Celtic) 관습 복구를 추진하던 일단의 그룹들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코웬왈이 자신의 교구를 분할할 때 사임하고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여기서 그는 668년 파리의 주교가 되었다. 그 후 코웬왈이 그를 다시 초빙하자 그는 이를 거절하고 엘레우테리우스를 보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아나스타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나스타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오, 아나스따시우스, 아나스타시우스.

 

 

아나스타시오 자료

순교자 성 아나스타시우스(또는 아나스타시오)와 성 플라키두스(Placidus) 그리고 성 게네시우스(Genesius)에 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로마 순교록이 전해주는 것은 그들의 이름과 성 아나스타시우스가 신부였다는 기록뿐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안드로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ndron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안드로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로니꼬, 안드로니꾸스, 안드로니쿠스.

 

 

안드로니코 자료

성 타라쿠스(Tarachus)와 성 프로부스(Probus)와 성 안드로니쿠스(또는 안드로니코)는 출신과 나이와 신분 등은 모두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실리시아(Cilicia) 지방의 폼페이오폴리스(Pompeiopolis)에서 체포되어 타르수스(Tarsus)로 끌려갔다.

성 타라쿠스는 소아시아 중남부의 고대 지역인 이사우리아(Isauria)의 클라우디오폴리스(Claudiopolis) 출신으로 젊어서 로마제국의 군인이 되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함과 동시에 군복을 벗었다.

성 프로부스는 팜필리아(Pamphylia) 지방 시데(Side,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 지중해 연안의 도시) 출신의 평민이었고, 성 안드로니쿠스는 에페수스(Ephesus,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 에게해 연안의 고대 도시)의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들은 먼저 타르수스에서 그리고 이어서 실리시아 지방의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와 아나자르부스(Anazarbus)로 끌려가서 세 번에 걸쳐 실리시아의 총독 막시무스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다양하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돌에 맞고 채찍으로 맞고 뜨겁게 달군 쇠에 지지고 찔리는 등의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어떤 고문으로도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된 막시무스는 그들을 아나자르부스 교외의 원형극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되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맹수들이 그들을 전혀 해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발을 핥았다. 결국 총독은 검투사들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0월 11일 목록에서 이들 세 순교자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0월 12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알렉산데르 사울리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Saul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534-1592년 파비아

 

 

알렉산데르 사울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사울리 자료

제노에제(Genoese) 가문의 아들로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태생인 성 알렉산데르 사울리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에 17세의 나이로 바르나바회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파비아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자비로 도서관을 지어 헌납하기도 하였다. 1556년 그는 같은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으며 또 뛰어난 설교가로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이를 지켜보던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는 그를 초빙하여 밀라노 대성당에서 설교하게 했는데, 너무나 청중들을 열광시켰기 때문에 스폰드라티(Sfondrati) 추기경(나중에 그레고리우스 14세 교황이 됨)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567년 그는 약관 33세의 나이로 총장이 되었고, 1570년에는 코르시카 알레리아 주교로 활약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교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였기에 '코르시카(Corsica)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1741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04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요한 23세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XXII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1881-1963년

 

 

요한 23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23세 자료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에서 12km 떨어진 소토 일몬테(Sotto il Monte)에서 가난한 농부인 조반니 론칼리(Giovanni Roncalli)의 14명의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제상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는 베르가모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교육을 받고 로마의 성 아폴리나레 대학(San Apollinare Institute)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중, 1902년 10월 영성 지도자인 구속주회의 프란체스코 피토키(Francesco Pitocchi) 신부를 만나면서 “하느님은 모든 것이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Dio tutto, io sono nulla)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명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04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서 사제품을 받은 그는 다음 해에 베르가모의 테데스키(Giacomo Maria Radini Tedeschi)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어 1914년 주교가 선종할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교구장 비서로 일하면서 그는 교구사와 신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의 연구 작업은 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가 된 라티(Ambrogio Damiano Achille Ratti) 추기경과의 만남을 갖게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의무병으로 그리고 후에는 군종 신부로 군 복무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21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는 그를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의 이탈리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어 1925년 아레오폴리스(Areopolis)의 명의 주교로 품을 받고 불가리아 감목 대리로 파견되었다.

1935년 대주교로 승품된 그는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 사절로 이스탄불에서 근무했다. 그는 교황청에 대해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터키 정부의 각료들과 우정을 맺으며 동방 교회 신자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힘쓰며 교회 일치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점령당한 그리스에 대한 도움과 유대인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철수한 1944년 12월 22일부터 파리 주재 교황청 대사로 임명된 그는 프랑스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1953년 1월 12일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 1월 15일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교황 비오 12세(Pius XII)의 선종으로 1958년 10월 25-28일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그는 7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선택한 그는 11월 4일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좋은 목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우선 교황이 된 후 처음으로 개최한 추기경 회의에서 추기경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는, 식스투스 5세(Sixtus V) 교황 때부터 내려오던 규정을 폐지하였다.

1958년 12월 23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했는데, 그중에는 밀라노(Milano) 교구장으로 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가 되는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까지 그가 임명한 추기경은 모두 87명으로 늘어났다.

1959년 1월 25일 교황 성 요한 23세는 추기경들에게 로마 교구 시노드 개최, 공의회 개최, 교회법전 개정 등 세 가지 계획을 선언하였다. 로마 교구 시노드는 1960년 1월 24-31일까지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개최되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는 교황 성 요한 23세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의 생활을 쇄신하고 그 가르침과 조직을 현대에 맞도록 개혁한다는 취지를 분명히 했다.

그 밖의 괄목할 만한 개혁으로는 그리스 멜키트파(Melchites) 총대주교 막시모스 4세(Maximos IV)의 호소를 받아들여 비잔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허가하는 한편, 미사 경본과 시간 전례서(성무일도)에 대한 새로운 예식 규정을 인가하고(1960년), 미사 통상문의 감사 기도 제1 양식(로마 전문)에 성 요셉(Josephus)의 이름을 삽입했으며(1962년), 교회법전 개정을 위한 교황청 위원회를 구성한 일(1963년)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1960년 교회 일치를 위한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을 신설하고 이듬해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의 대표가 참가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비가톨릭 인사들을 참관인으로 초대하는 등 일련의 쇄신 작업이 이어졌다.

그는 또한 회칙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1961년 5월 15일)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사회 가르침을 쇄신하고,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년 4월 11일)를 통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온 인류가 함께 힘써야 함을 강조했다.

1963년 5월 22일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축복을 준 교황 성 요한 23세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던 6월 3일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5년도 채 안 된 재임 동안 성 요한 23세 교황은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되도록 가톨릭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좋으신(착한) 교황’(papa buono)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는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소송이 시작되어, 2000년 9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에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청 시성성은 성 요한 23세 교황이 시성을 위해 필요한 두 번째 기적 심사 없이 시성될 수 있는 거룩한 인물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공로를 인정해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시성 승인을 받았다. 성 요한 23세 교황의 축일은 일반적 관례에 따라 선종한 날인 6월 3일에 기념하다가 시성식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일인 10월 11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제네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ene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제네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네시오, 게네시우스, 제네시우스.

 

 

제네시오 자료

순교자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와 성 플라키두스(Placidus) 그리고 성 게네시우스(또는 제네시오)에 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로마 순교록이 전해주는 것은 그들의 이름과 성 아나스타시우스가 신부였다는 기록뿐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제르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erm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90년 브장송

 

 

제르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르마노, 게르마누스, 제르마누스, 젤마노.

 

 

제르마노 자료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성 데시데라투스(Desideratus)를 계승하여 프랑스 브장송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에 의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카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Cani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19-599년 킬케니

 

 

카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니스, 까니꼬, 까니꾸스, 카니스, 카니쿠스, 켄네스.

 

 

카니코 자료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불확실한 전설에 기반을 둔 것인데, 성 카니쿠스(Canicus, 또는 카니코)는 아일랜드의 글랜기븐(Glengiven)에서 태어났고, 웨일스(Wales)의 란카판(Llancarfan)에서 성 카독(Cadoc)의 지도하에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로마(Roma)를 여행한 뒤, 아일랜드의 클로나드(Clonard)에서 성 핀니안(Finnian)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그는 성 키아란(Ciaran), 성 콜룸바(Columba), 그리고 성 콤갈(Comgall)과 동행하여 아일랜드 전역을 돌며 설교하였고 그 후 스코틀랜드로 갔다.

성 콜룸바의 절친한 친구이던 그는 이 지역의 가장 성공적인 선교사가 되었다. 아일랜드의 아가보(Aghaboe)에는 수도원을 지었고, 아마도 렌스터(Leinster)의 킬케니(Kilkenny) 수도원도 그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켄네스(Kenneth)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퀴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Qui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퀴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귀리노, 귀리누스, 뀌리노, 뀌리누스, 퀴리누스.

 

 

퀴리노 자료

성 니카시우스(Nicasius)는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일찍이 1세기에 갈리아(Gallia) 지방 복음화를 위해 로마에서 파견한 첫 번째 선교사 중 한 명과 연관 짓고 있다. 반면 또 다른 전승에서는 성 니카시우스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루앙(Rouen)으로 순례하던 중 신앙 때문에 살해된 주교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는 루앙에 머물거나 그곳에서 선교하지는 않았고, 주로 파리와 루앙 사이에 있는 벡생(Vexin)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전개해 ‘벡생의 사도’로 불리고 있다.

게다가 루앙 교구의 주교단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도 종종 루앙의 초대 주교로 언급되고 있고, 실제 루앙의 초대 주교로 더 많이 알려진 성 멜라니우스(Melanius, 10월 22일)의 스승으로서 그에게 주교좌를 물려주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1일 목록에서 페세니누스(Fescenninus) 총독 시절에 벡생에서 루앙의 주교인 성 니카시우스와 성 퀴리누스(또는 퀴리노) 신부와 성 스쿠비쿨루스(Scubiculus) 부제 그리고 동정녀인 성녀 피엔티아(Pientia)가 순교했다고 그들의 이름과 신분을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 프랑스에 속한 벡생 지역에서 성 니카시우스와 성 퀴리누스와 성 스쿠비쿨루스와 성녀 피엔티아 순교자를 기념한다고 간단히 이름만 기록하였다.

성 니카시우스는 종종 랭스(Reims)의 주교인 성 니카시우스(12월 14일)와 같은 인물로 혼동되기도 하는데, 그런 이유로 교회 미술에서 랭스의 성 니카시우스가 참수된 후 자기 머리를 들고 무덤으로 갔다는 이야기대로 자기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그리고 성 퀴리누스의 유물은 875년경 샤를 2세(Charles le Chauve) 때 벨기에의 리에주(Liege) 남동쪽에 있는 말메디(Malmedy) 수도원으로 옮겨져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타라코

 

  • 가톨릭 성인 이름
    Tarach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39?-304년경

 

 

타라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따라꼬, 따라꾸스, 타라쿠스.

 

 

타라코 자료

성 타라쿠스(또는 타라코)와 성 프로부스(Probus)와 성 안드로니쿠스(Andronicus)는 출신과 나이와 신분 등은 모두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실리시아(Cilicia) 지방의 폼페이오폴리스(Pompeiopolis)에서 체포되어 타르수스(Tarsus)로 끌려갔다.

성 타라쿠스는 소아시아 중남부의 고대 지역인 이사우리아(Isauria)의 클라우디오폴리스(Claudiopolis) 출신으로 젊어서 로마제국의 군인이 되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함과 동시에 군복을 벗었다.

성 프로부스는 팜필리아(Pamphylia) 지방 시데(Side,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 지중해 연안의 도시) 출신의 평민이었고, 성 안드로니쿠스는 에페수스(Ephesus,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 에게해 연안의 고대 도시)의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들은 먼저 타르수스에서 그리고 이어서 실리시아 지방의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와 아나자르부스(Anazarbus)로 끌려가서 세 번에 걸쳐 실리시아의 총독 막시무스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다양하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돌에 맞고 채찍으로 맞고 뜨겁게 달군 쇠에 지지고 찔리는 등의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어떤 고문으로도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된 막시무스는 그들을 아나자르부스 교외의 원형극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되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맹수들이 그들을 전혀 해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발을 핥았다.

결국 총독은 검투사들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0월 11일 목록에서 이들 세 순교자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0월 12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프로보

 

  • 가톨릭 성인 이름
    Prob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프로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로보, 쁘로부스, 프로부스.

 

 

프로보 자료

성 타라쿠스(Tarachus)와 성 프로부스(또는 프로보)와 성 안드로니쿠스(Andronicus)는 출신과 나이와 신분 등은 모두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실리시아(Cilicia) 지방의 폼페이오폴리스(Pompeiopolis)에서 체포되어 타르수스(Tarsus)로 끌려갔다.

성 타라쿠스는 소아시아 중남부의 고대 지역인 이사우리아(Isauria)의 클라우디오폴리스(Claudiopolis) 출신으로 젊어서 로마제국의 군인이 되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함과 동시에 군복을 벗었다.

성 프로부스는 팜필리아(Pamphylia) 지방 시데(Side,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 지중해 연안의 도시) 출신의 평민이었고, 성 안드로니쿠스는 에페수스(Ephesus,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 에게해 연안의 고대 도시)의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들은 먼저 타르수스에서 그리고 이어서 실리시아 지방의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와 아나자르부스(Anazarbus)로 끌려가서 세 번에 걸쳐 실리시아의 총독 막시무스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다양하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돌에 맞고 채찍으로 맞고 뜨겁게 달군 쇠에 지지고 찔리는 등의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어떤 고문으로도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된 막시무스는 그들을 아나자르부스 교외의 원형극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되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맹수들이 그들을 전혀 해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발을 핥았다. 결국 총독은 검투사들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0월 11일 목록에서 이들 세 순교자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0월 12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플라치도

 

  • 가톨릭 성인 이름
    Placi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플라치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라치두스, 플라키도, 플라키두스, 플래시드.

 

 

플라치도 자료

순교자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와 성 플라키두스(Placidus, 또는 플라치도) 그리고 성 게네시우스(Genesius)에 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로마 순교록이 전해주는 것은 그들의 이름과 성 아나스타시우스가 신부였다는 기록뿐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플라치디아

 

  • 가톨릭 성인 이름
    Placidi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460년 베로나

 

 

플라치디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쁠라끼디아, 쁠라치디아, 플라키디아.

 

 

플라치디아 자료

성녀 플라키디아(또는 플라치디아)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살았으며 거룩한 생활과 동정녀로서 일생을 봉헌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끔 발렌티니아누스 3세 로마 황제의 딸인 동시대의 플라키디아와 혼동되기도 하나 다른 인물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피르미노

 

  • 가톨릭 성인 이름
    Firm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53년 위제

 

 

피르미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피르미누스, 피르민.

 

 

피르미노 자료

프랑스 남부 나르본(Narbonne)에서 태어난 성 피르미누스(또는 피르미노)는 그의 삼촌을 계승하여 22세의 젊은 나이에 위제의 주교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15년 이상 자신의 교구를 돌보았다. 그는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11월 1일)의 친구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필립보

 

  • 가톨릭 성인 이름
    Philip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필립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필립보 자료

성 필리푸스(Philippus, 또는 필립보)는 사도들로부터 선발된 일곱 보조자(부제) 중의 한 명으로(사도 6,5),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후 사마리아 고을로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다(사도 8,4-8).

그곳에서 마술사 시몬의 개종을 이끌어 냈고(사도 8,9-13), 천사의 인도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를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다(사도 8,26-39).

그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40)는 말처럼 지중해 연안 남쪽의 가자와 아스돗에서부터 자신의 집이 있는 사마리아 지방 카이사리아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카이사리아에서 결혼하지 않은 딸 넷과 함께 살았는데, 그 딸들도 예언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사도 21,8-9).

그리스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 서부 아나톨리아(Anatolia) 지방에 있는 트랄레스(Tralles) 교구의 주교였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6일 목록에서 성 필리푸스의 선교 활동을 소개한 후 그가 카이사리아에서 평화로이 선종해 묻혔고, 그 곁으로 동정녀이자 예언자였던 세 명의 딸들이 묻혔다.

그리고 넷째 딸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에페수스에서 선종했다고 전해주었다. 그의 설교가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종종 그를 ‘복음사가 필리푸스’(Philip the Evangelist)라고도 불렀고, 그로 인해서 사도 성 필리푸스와 혼동되기도 했다.

동방 정교회 등에서는 10월 11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10월 11일로 그의 기념일을 옮겨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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