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마글로리오, 마르코, 마르티노, 세녹, 셉티모, 아레타, 아우닥토,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야누아리오, 에베르지슬로, 요한 안젤로 포로, 포르투나토, 프로클로, 총 1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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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2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3가지
10월 24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마글로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aglo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75/605년? 돌
마글로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글로리우스, 마글루아르, 마글르와르, 매글로어, 멜로르.
마글로리오 자료
성 마글로리우스(또는 마글로리오)는 6세기 초반 영국 웨일스(Wales) 남부의 글러모건(Glamorgan)에서 태어나 어릴 때 성 일투드(Illtud, 11월 6일)의 보호를 받고 성장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사촌 사이인 성 삼손(Samson, 7월 28일)과 함께 사제품을 받고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랑뫼르(Lanmeur) 수도원의 원장직을 역임하며 동료인 성 삼손의 선교 사업을 지원하였다.
그러다가 돌의 주교가 된 성 삼손이 선종한 뒤에 그를 승계하여 돌의 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천사의 방문을 받고 주교직을 성 부독(Budoc, 12월 9일)에게 물려준 후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한적한 영국 해협의 사크(Sark) 섬으로 물러나 수도원을 세우고 여생을 보냈다.
그의 생애에 대해 전해주는 전기에 따르면, 그는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여러 번 행했고 그로 인해 늘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 사크 섬의 백작이 중병을 앓을 때 그가 기적적으로 완쾌시킴으로써 그 답례로 섬의 땅 일부를 선물로 주어 수도원 건립을 도왔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도원 아래 해변의 버려진 난파선에서 놀던 아이들이 바다로 떠밀려 갔을 때, 그가 기적적으로 아이들과 배를 안전한 해안으로 이동해 구했다고 한다. 그는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사크 섬에서 선종해 그곳에 묻혔다. 그리고 그는 성 마글루아르(Magloire) 또는 성 멜로르(Maelor)로도 불린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24일 목록에서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성 일투드의 제자이자 돌의 성 삼손 주교를 계승해 주교가 된 후 사크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한 성 마글로리우스를 기념한다고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코
- 가톨릭 성인 이름
Mark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80년
마르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마르코 자료
로마 순교록에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용맹한 군인 성 마르코(Marcus)라고 언급하나,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는 그를 마르티누스(Martinus)라고 부른다.
그는 마르시쿠스 산의 조그마한 동굴 속에 혼자 살았는데, 뱀의 형상으로 된 사탄이 매일 나타나서 3년간이나 심각한 물 부족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또 그는 동굴 속에서 지낼 때에는 발목을 쇠사슬로 묶어 그 끝을 바위에 감아둠으로써 멋대로 거주지를 벗어나지 않게 하였다고 전해온다.
한번은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서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메시지가 당도하였는데, 그 내용은 “만일 그대가 하느님의 종이라면 쇠사슬로 묶지 말고 그리스도의 끈으로 묶으시오”였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즉시 쇠사슬을 풀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르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베르투
마르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자료
프랑스 낭트(Nantes) 출신인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프랑크계이며 성 펠릭스(Felix)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프와투(Poitou)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선 자신이 머문 집 주인 부부를 개종시켰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낭트 부근의 강변 숲 속으로 들어가서 은둔소를 지었는데, 이것이 베르투 대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에 대한 자세한 전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세녹
- 가톨릭 성인 이름
Senoc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76년
세녹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쎄녹.
세녹 자료
성 세녹은 프랑스 프와투(Poitou) 태생이나 이교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면서부터 집을 떠나 은수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는 프랑스 중부의 투렌(Touraine) 지방을 방황하다가 한 마을에 적당한 곳을 발견하여 자신의 움막과 소성당을 손수 돌을 날라다 지었다.
성 세녹에게는 3명의 제자들이 모였지만 그는 자기 혼자 독수생활을 즐기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성덕은 더욱 높아졌고 따르려는 사람도 줄을 이었다.
투르(Tours)의 주교 에우프로니우스(Euphronius)가 서거했을 때 투르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는 그를 찾아가 주교를 계승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성 그레고리우스 주교의 품안에서 고이 잠들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셉티모
- 가톨릭 성인 이름
Sept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독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셉티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셉티무스, 쎕띠모, 쎕띠무스, 쎕티모, 쎕티무스.
셉티모 자료
성 펠릭스(Felix)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서 멀지 않은 티비우카 교구의 주교였으나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다만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첫 순교자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당시 로마제국의 동쪽을 지배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303년 2월 23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포고령을 내렸는데, 아프리카에 있는 티비우카에서도 6월 5일 선포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성경과 전례서를 전부 제출받고 모든 성당을 파괴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카르타고에 있던 성 펠릭스 주교는 교구로 돌아온 즉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시인하면서도 제출하기를 거부해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성 펠릭스 주교는 성경을 제출하라는 카르타고 지방 총독의 명령을 완강히 거부하며 그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
“거룩한 책들을 도둑에게 넘기기보다 차라리 태워버리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느님께 순종하겠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한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56년을 살았습니다. 저는 정결을 지켰고,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영원히 계시는 주님께 바치는 제물로 제 목을 내어놓습니다.”
티비우카 교구의 사제인 성 아우닥투스(Audactus)와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그리고 독서자인 성 셉티무스(또는 셉티모)와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도 성 펠릭스 주교와 함께 카르타고로 끌려가 7월 15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이날 ‘천상 탄일’을 그들의 축일로 기념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이날 카르타고의 성 파우스투스(Faustus) 대성당에서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공경해왔다. 그런데 후대에 같은 이름의 다른 성인과 혼동되면서 성 펠릭스가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 지방의 베노사(Venosa)에서 순교했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그로 인해서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10월 24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순교한 날인 7월 15일로 옮겨 성 펠릭스의 수난과 죽음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다른 네 동료 순교자에 대해서는 자료 등의 미비로 인해 더는 목록에 추가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아레타
- 가톨릭 성인 이름
Aret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23년 나그란
아레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레따스, 아레타스.
아레타 자료
아라비아 남서부 하드란(Hadran)의 베니 하리트(Beni Harith) 공동체의 원장이며, 압둘라 이븐 칸(Abdullah Ibn Kahn)으로도 알려진 성 아레타와 340명의 주민들이 듀 노와스(Dhu Nowas) 또는 두난(Dunaan) 휘하의 유대인들의 무리들로부터 특사를 받은 직후에 학살되었다.
두난은 유대교로 개종한 인물이며, 악수미트 에티오피아인들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 학살은 도시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모하메드에 의해 코란 속에도 기록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아우닥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udac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아우닥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닥또, 아우닥뚜스, 아우닥투스.
아우닥토 자료
성 펠릭스(Felix)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서 멀지 않은 티비우카 교구의 주교였으나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다만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첫 순교자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당시 로마제국의 동쪽을 지배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303년 2월 23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포고령을 내렸는데, 아프리카에 있는 티비우카에서도 6월 5일 선포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성경과 전례서를 전부 제출받고 모든 성당을 파괴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카르타고에 있던 성 펠릭스 주교는 교구로 돌아온 즉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시인하면서도 제출하기를 거부해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성 펠릭스 주교는 성경을 제출하라는 카르타고 지방 총독의 명령을 완강히 거부하며 그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
“거룩한 책들을 도둑에게 넘기기보다 차라리 태워버리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느님께 순종하겠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한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56년을 살았습니다. 저는 정결을 지켰고,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영원히 계시는 주님께 바치는 제물로 제 목을 내어놓습니다.”
티비우카 교구의 사제인 성 아우닥투스(또는 아우닥토)와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그리고 독서자인 성 셉티무스(Septimus)와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도 성 펠릭스 주교와 함께 카르타고로 끌려가 7월 15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이날 ‘천상 탄일’을 그들의 축일로 기념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이날 카르타고의 성 파우스투스(Faustus) 대성당에서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공경해왔다.
그런데 후대에 같은 이름의 다른 성인과 혼동되면서 성 펠릭스가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 지방의 베노사(Venosa)에서 순교했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그로 인해서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10월 24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순교한 날인 7월 15일로 옮겨 성 펠릭스의 수난과 죽음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다른 네 동료 순교자에 대해서는 자료 등의 미비로 인해 더는 목록에 추가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Mary Clare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7-1870년 산티아고데쿠바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렛,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자료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클라렛(Antonius Maria Claret, 또는 안토니오)은 에스파냐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비크(Vich) 교구 관할인 살렌트(Sallent)에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나 183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5년 후부터 그는 카탈루냐 전역을 다니며 사목하고 피정을 지도하였다. 그 후 그는 보다 큰일을 해보려고 1849년 7월 16일 다섯 명의 사제들을 모아 설교 활동을 하는 수도회를 세웠는데, 지금은 이 회를 클라렛 선교 수도회(Claretian missionaries) 라고 부른다.
다음 해에 그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2세(Isabel II) 여왕의 요청으로 산티아고데쿠바의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이 교구의 주민들은 흥분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클라렛의 엄격하고 세심한 개혁 운동은 많은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신학교 개혁과 성직자 쇄신을 추진하면서 방대한 관할 구역을 수시로 순회하였다.
또한 결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농사법을 권장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가정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협동조합을 결성하도록 도왔다. 이 과정에서 성 안토니우스는 수많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에스파냐로 돌아온 그는 이사벨 2세 여왕의 고해신부 겸 왕실의 영성 지도자가 되었고, 설교와 간행물을 통한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아 출판사를 설립하여 많은 가톨릭 서적들을 보급하였다.
또한 그는 문화 방면에도 관심이 커 에스코리알(Escorial)에 과학 연구소, 자연사 박물관, 음악 학교, 언어 학교들을 세우고, 바르셀로나(Barcelona)에는 수도자 도서관을 세우기도 하였다.
1868년의 혁명 때 그는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추방된 이사벨 여왕과 함께 로마(Roma)로 가서 제1차 바티칸(Vatican)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이후 에스파냐로 돌아가지 못하고 1870년 프랑스 나르본(Narbonne) 근처 프롱프루아드(Frontfroide)의 클라렛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성 안토니우스는 1934년 2월 2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0년 5월 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야누아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Janu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야누아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누아리우스, 자누아리오, 자누아리우스.
야누아리오 자료
성 펠릭스(Felix)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서 멀지 않은 티비우카 교구의 주교였으나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다만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첫 순교자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당시 로마제국의 동쪽을 지배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303년 2월 23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포고령을 내렸는데, 아프리카에 있는 티비우카에서도 6월 5일 선포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성경과 전례서를 전부 제출받고 모든 성당을 파괴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카르타고에 있던 성 펠릭스 주교는 교구로 돌아온 즉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시인하면서도 제출하기를 거부해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성 펠릭스 주교는 성경을 제출하라는 카르타고 지방 총독의 명령을 완강히 거부하며 그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
“거룩한 책들을 도둑에게 넘기기보다 차라리 태워버리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느님께 순종하겠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한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56년을 살았습니다. 저는 정결을 지켰고,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영원히 계시는 주님께 바치는 제물로 제 목을 내어놓습니다.”
티비우카 교구의 사제인 성 아우닥투스(Audactus)와 성 야누아리우스(또는 야누아리오) 그리고 독서자인 성 셉티무스(Septimus)와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도 성 펠릭스 주교와 함께 카르타고로 끌려가 7월 15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이날 ‘천상 탄일’을 그들의 축일로 기념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이날 카르타고의 성 파우스투스(Faustus) 대성당에서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공경해왔다. 그런데 후대에 같은 이름의 다른 성인과 혼동되면서 성 펠릭스가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 지방의 베노사(Venosa)에서 순교했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그로 인해서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10월 24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순교한 날인 7월 15일로 옮겨 성 펠릭스의 수난과 죽음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다른 네 동료 순교자에 대해서는 자료 등의 미비로 인해 더는 목록에 추가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에베르지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Evergis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말? 쾰른
에베르지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베르기슬로, 에베르기슬루스, 에베르지슬루스.
에베르지슬로 자료
독일 쾰른의 성 세베리누스(Severinus) 주교가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에 속한 림뷔르흐(Limburg) 지방의 통에런(Tongeren)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한 소년이 매우 인상적이라 그를 자세히 관찰했는데, 그는 매우 뛰어난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 소년이 바로 성 에베르기슬루스(또는 에베르지슬로)였다.
그 후 그는 성 세베리누스 주교의 부제가 되었다가 스승의 뒤를 이어 쾰른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사목자로 큰 존경을 받았으며 밤마다 그곳의 성모 성당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러 그 성당으로 가다가 이교도 강도들을 만나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로서도 공경을 받는다.
그의 유해는 쾰른의 성녀 체칠리아 성당에 모셔졌다가 1802년 쾰른의 성 베드로 성당으로 옮겨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에베르기슬루스가 모셔진 성당에서 이 성인에게 기도하면 두통이 사라진다는 전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요한 안젤로 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Angelo Porr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504년경
요한 안젤로 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안젤로 포로 자료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태생인 요한 안젤로 포로(Joannes Angelo Porro)는 성모의 종 수도회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이 수도회의 발상지인 몬테 세나리오(Monte Senario)에서 기도와 고독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성덕은 날로 높아갔고 그를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여러 수도원을 옮겨 다닐 정도로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카바쿠르타에서 자기 누이의 환시를 보았는데, 그는 이것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계시로 보았다.
고향인 밀라노로 오자마자 그는 더욱 열심히 일하면서 임종을 고대하던 중에 하느님의 천사를 맞이하게 되어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포르투나토
- 가톨릭 성인 이름
Fortun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독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포르투나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포르투나또, 포르투나뚜스, 포르투나투스.
포르투나토 자료
성 펠릭스(Felix)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서 멀지 않은 티비우카 교구의 주교였으나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다만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첫 순교자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당시 로마제국의 동쪽을 지배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303년 2월 23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포고령을 내렸는데, 아프리카에 있는 티비우카에서도 6월 5일 선포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성경과 전례서를 전부 제출받고 모든 성당을 파괴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카르타고에 있던 성 펠릭스 주교는 교구로 돌아온 즉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시인하면서도 제출하기를 거부해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성 펠릭스 주교는 성경을 제출하라는 카르타고 지방 총독의 명령을 완강히 거부하며 그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
“거룩한 책들을 도둑에게 넘기기보다 차라리 태워버리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느님께 순종하겠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한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56년을 살았습니다. 저는 정결을 지켰고,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영원히 계시는 주님께 바치는 제물로 제 목을 내어놓습니다.”
티비우카 교구의 사제인 성 아우닥투스(Audactus)와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그리고 독서자인 성 셉티무스(Septimus)와 성 포르투나투스(또는 포르투나토)도 성 펠릭스 주교와 함께 카르타고로 끌려가 7월 15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이날 ‘천상 탄일’을 그들의 축일로 기념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이날 카르타고의 성 파우스투스(Faustus) 대성당에서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공경해왔다. 그런데 후대에 같은 이름의 다른 성인과 혼동되면서 성 펠릭스가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 지방의 베노사(Venosa)에서 순교했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그로 인해서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10월 24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순교한 날인 7월 15일로 옮겨 성 펠릭스의 수난과 죽음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다른 네 동료 순교자에 대해서는 자료 등의 미비로 인해 더는 목록에 추가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프로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roc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총대주교, 교부 - 활동 연도와 지역
390?-446년 콘스탄티노플
프로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로끌로, 쁘로끌루스, 프로클루스.
프로클로 자료
콘스탄티노플 태생인 성 프로클루스(또는 프로클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의 제자로서 독서직을 받았으나 이상하게도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반대자인 아티쿠스(Patriarch Atticus)로부터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고 그의 비서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이던 아티쿠스가 죽은 뒤 그는 아티쿠스의 후임인 시신니우스(Sisinnius)로부터 키지쿠스(Cyzicus)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수도자인 달마티우스(Dalmatius)를 주교로 선출한 그 도시 성직자와 주민들의 반대로 실제 부임하지는 못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면서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434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이단과 기타 군소 이단들이 소용돌이치는 매우 혼란스런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와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의 교리를 따르도록 권함으로써 정통교리를 지켰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 키릴루스(Cyrillus, 6월 27일)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신심이 충만하고, 정통교리의 세심한 옹호자이다."
훌륭한 설교가였던 성 프로클루스는 446년 7월 12일경에 숨을 거두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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