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세례명 가스파르는 가스발, 가스팔, 카스파르, 카스팔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가스파르 3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가스파르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가스파르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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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남자세례명 목록
- 가스파르 델 부팔로 (1월 2일)
- 가스파르 (1월 6일)
- 가스파르 베르토니 (6월 12일)
1. 가스파르 델 부팔로
- 세례명 축일
1월 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Gaspar del Bufalo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6-1837년
가스파르 델 부팔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스발, 가스팔.
가스파르 델 부팔로 이야기
이탈리아 로마(Roma) 태생인 성 가스파르는 요리사의 아들이었으나,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교육받고 1808년에 서품되었다.
그는 교황 비오 8세(Pius VIII)의 추방 이후 나폴레옹 보나팔트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기 때문에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5년 동안 코르시카(Corsica)로 유배당하였다.
그가 귀향할 때에는 훌륭한 선교사가 되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회를 설립하여 1815년에 교황 비오 7세로부터 보혈선교회로 공식 승인을 받았다.
성 가스파르는 스폴레토(Spoleto) 부근 지아노(Giano)와 알바노(Albano)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이었기에 이런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의 선교회는 날로 발전하였다.
그는 또 자선사업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임하였으며, 세상의 복음화가 자기 선교사들의 목표임을 늘 주지시켰다. 그는 1837년 12월 28일 알바노에서 콜레라에 희생되어 운명하였다.
그는 1904년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54년 6월 1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10월 21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가스파르
- 세례명 축일
1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Gaspar - 신분과 직업
동방박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가스파르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스발, 가스팔, 카스파르, 카스팔.
가스파르 이야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해주는 마태오 복음은 2장 1-12절에서 동방에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세 명의 박사들의 방문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성경에서 삼왕 또는 동방 박사로 번역되어 사용하는 그리스어 ‘마고이’의 단수 ‘마고스’(magos)는 본래 ‘현자’ 또는 ‘꿈의 해석자’라는 뜻이다.
마고스는 원래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에 정복된 메디아 왕국에서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제 계급을 지칭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술이나 마술에 능숙한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성향을 지닌 ‘마고스’와 사기꾼 마술가인 ‘마고스’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온 이들을 ‘마고스’라는 단어로 표현했는데, 이는 마고스라는 단어가 지닌 다양한 뜻 중에서 특별히 천문학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지칭한 것이다.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의 자연 계시를 통해 유다인보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되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의 별을 보고 그분을 경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온 동방 박사들은 헤로데의 왕궁으로 찾아갔으나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 동방 박사의 방문으로 놀란 헤로데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아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물었다.
그들은 미카서 5장 1절,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라는 말씀을 들어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알려주었다.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는 자신도 경배하러 갈 테니 아기를 찾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동방 박사는 헤로데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나 별이 멈춘 곳에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엎드려 경배하며 보물 상자를 열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리고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다.
마태오 복음서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돌아간 동방 박사들의 신분이나 이름, 인원수 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2세 말엽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마고스’를 왕으로 설명했다.
또 3세기에 오리게네스(Origenes)는 세 가지 선물에 근거해서 이들의 숫자를 세 명으로 간주했다. 8세기부터 동방 박사들은 성 발타사르(Balthasar), 성 멜키오르(Melchior), 성 가스파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학자들은 그들이 온 곳을 메소포타미아나 페르시아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공경이 시작되면서 5세기 말경 동방 박사의 유해가 밀라노의 주교 성 에우스토르기우스 1세(Eustorgius I, 9월 18일)에 의해 밀라노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의 유해는 1162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황제에 의해 독일의 쾰른 주교좌성당으로 옮겨져 가장 큰 성해함에 모셔져 있다고 전해진다.
동방 박사에 대한 공경과 함께 그들은 교회 미술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인종이나 나이 등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대신 다양한 전승과 작가들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모두가 백인으로 또는 한 명이 흑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연령대 또한 노년, 중년, 청년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성 베다(Beda, 5월 25일) 존자(Venerable)는 삼왕(三王)이 각각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대표한다고 설명했고, 이에 따라 백인, 황인, 흑인으로 동방 박사를 표현한 작품도 있다.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린 세 가지 선물 중 황금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유향은 대사제로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몰약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이런 다양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동방 박사의 방문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동방 박사의 방문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유다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는 선교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성탄시기 안에 동방 박사의 방문과 그 의미를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성대히 경축하고 있다. 성 가스파르는 카스파르(Caspa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가스파르 베르토니
- 세례명 축일
6월 1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Gaspar Bertoni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7-1835년
가스파르 베르토니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스발, 가스팔, 베르또니.
가스파르 베르토니 이야기
성 가스파르 베르토니는 1777년 10월 9일 이탈리아 베로나(Verona)에서 부유한 법률가이자 공증인이었던 프란시스(Francis)와 브루노라 라벨리 베르토니(Brunora Ravelli Bertoni)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후 예수회와 베로나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학교에 있는 마리아회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11살에 첫영성체를 할 때 사제가 되리라는 환시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1796년 신학교에 입학한 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북이탈리아가 20년간 점령당했을 때 그는 병원사목을 위한 복음적 형제회에 참여하여 상처 입고 병든 이들, 혁명군의 점령으로 쫓겨나거나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1800년 9월 20일 사제로 서품된 성 가스파르는 성 바오로 본당에서 젊은이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는 레지오 마리애의 형태를 빌려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단체는 1807년 나폴레옹의 법령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결국 그는 더 나은 시기에 그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고 연기하였다.
그는 또한 카노사(Canossa)의 성녀 막달레나(Magdalena, 4월 10일)가 성 요셉 수도원에 세운 공동체의 영적 지도를 맡았다. 그는 당시 수녀회의 지도신부와 신학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영성 지도자로서 활동하였고 또 잘 알려진 설교가였다.
1810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성 피르무스(Pirmus) 본당으로 이동한 그는 주교로부터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부탁받은 후 자신의 사제관에서 잦은 모임을 통해 젊은 신학생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굳건하게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종 목표는 무조건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한 사제들의 쇄신이었다.
그는 당시 교황 비오 7세(Pius VII)가 나폴레옹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교황을 위한 기도와 지원을 위한 전 유럽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황은 언제나 교회의 ‘으뜸이자 움직일 수 없는 반석’이었다.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교회의 재건은 시작되었다. 그는 양떼를 다시 모아야 할 필요성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교우들에게 행해지는 설교를 통해 신앙의 근본 진리들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리교육과 설교에 투신하였다.
1816년 11월 4일 그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흔의 수도회’(Congregation of the Sacred Stigmata of Our Lord Jesus Christ)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학교를 세워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오상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참회의 공동생활을 했고, 주교의 요청에 따라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교육하고 사제를 양성하며 선교를 위한 설교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성모 마리아(Maria)와 성 요셉(Josephus)의 보호아래 수도회를 맡겼다.
성 가스파르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0여 년 동안 오른쪽 다리의 발열과 계속되는 감염으로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수술을 받으면서도 그는 병원 침대에서 지속적으로 상담자요 영성 지도자로서 봉사하였다.
1835년 6월 12일 그가 선종한 후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베로나를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1975년 11월 1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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