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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남자세례명 24가지

피어나네 2023. 12.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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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나훔, 디오도로, 랄프 셔윈, 레온시오, 로가토, 루치오, 리카르도 랭리, 마리아노, 샤를 드 푸코, 아나니아, 아제리코, 안사노, 안토니오 본파디니,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 에드문도 캠피언, 에바시오, 엘리지오, 올림피아데, 요한, 요한 베슈, 우르시치노, 카스트리시아노, 카시아노, 프로쿨로, 총 24분 목록이에요.

 

12월 1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12월 1일 여자세례명 나탈리아, 칸디다,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2월 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4가지

 

 

 

 

12월 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나훔

  2. 디오도로

  3. 랄프 셔윈

  4. 레온시오

  5. 로가토

  6. 루치오

  7. 리카르도 랭리

  8. 마리아노

  9. 샤를 드 푸코

  10. 아나니아

  11. 아제리코

  12. 안사노

  13. 안토니오 본파디니

  14.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

  15. 에드문도 캠피언

  16. 에바시오

  17. 엘리지오

  18. 올림피아데

  19. 요한

  20. 요한 베슈

  21. 우르시치노

  22. 카스트리시아노

  23. 카시아노

  24. 프로쿨로

 

12월 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4가지

 

 

1. 나훔

 

  • 가톨릭 성인 이름
    Nahu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세기BC

 

 

나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나훔 자료

엘코스(Elkosh) 출신의 예언자 성 나훔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그가 남긴 조그마한 예언서밖에 없다. 그나마 이 예언서까지 숱한 주석 상의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성경 주석가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추정은 그가 유다 출신의 예언자라는 사실 뿐이다. 

왜냐하면 예언자가 유다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동시에 유다에 구원을 선포하고 외적의 공략이 더는 없으리라는 보장(2,1)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2-8의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의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 ‘알파벳 노래’(acrostic 시편)를 통해 나훔이 ‘성전(聖殿)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훔이 성전의 모든 의식(儀式)과 활동에 정통한 예언자로서 성전 주변에 머무르며 자기 예언직을 수행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튼 나훔 예언자는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가 함락(기원전 612년)되기 직전 격동의 어두운 시대를 살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된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선포함으로써 위로와 희망을 전해준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나훔서는 주님의 분노를 알리는 알파벳 순서의 ‘시편 - 예언자의 반성 - 역사적 사건의 회고’라는 도식으로 짜여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 중, 이 찬미의 노래를 부름으로써 주님의 지상 통치권을 찬양하였다. 

비록 나훔서의 서두에 나오는 이 시편이 예언자 나훔의 생존 당시보다 훨씬 후대에 작시(作詩)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지만, 아직 확증할 방도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훔이 직접 이 시편을 작시했거나, 아니면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노래를 인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찬양 시를 봉독하며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느님의 정열과 그분의 선하심과 권능에 대한 신앙을 견고케 할 수가 있었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기 나라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괴롭히는 이방 민족까지 지배한다고 믿고 있었다.

신앙고백과 찬미로 시작하는 나훔 예언자의 반성은 그가 선포한 메시지를 역사적 현실을 들어 예시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하느님은 원수를 응징하는 하느님이요 외로운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나 불경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는 하느님이시다. 

물론 여기서 의인(義人)이란 이스라엘 백성이고 악인이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아시리아인이다. 나훔 예언자는 기도문으로 사용된 이 예언서에 풍부한 비유적 표현을 통해 죄악의 도성(都城) 니네베가 패망하리라 예고하였다(2,4-3,19).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례 때 이 기도문을 읽으면서 니네베의 패망을 목전의 현실처럼 절감하고, 오랜 시일 동안 신앙과 희망을 고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훔서의 저자는 의(義)와 불의(不義)에 대해서 정열적으로 작품을 썼다.

나훔이라는 예언자의 이름은 ‘주님께서 위로하시다’ 또는 ‘주님의 위로’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나훔야’의 줄임말로 보인다. 이름의 뜻대로 그는 오랫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위협하던 아시리아 제국의 몰락과 하느님의 승리를 선포함으로써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또한 나훔은 역사 안에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을 찬양하자고 외쳤다. 예언자가 전례나 설교에서 역사의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의도는 현재 상황의 의미를 깨닫고 지향해야 할 미래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밝히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훔 예언자의 메시지에서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든 인류의 ‘절대 미래’는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 모든 악의 세력과 영화와 권세는 한낱 풀포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디오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Diodo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3년

 

 

디오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오도루스.

 

 

디오도로 자료

성 디오도루스(또는 디오도로) 신부와 성 마리아누스(Marianus) 부제는 누메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많은 로마(Roma)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들은 카타콤바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박해자들이 지하 성당의 입구를 막아버려 순교하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랄프 셔윈

 

  • 가톨릭 성인 이름
    Ralph Sherw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0-1581년 영국

 

 

랄프 셔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랠프, 루돌포, 루돌푸스, 루돌프.

 

 

랄프 셔윈 자료

영국 잉글랜드 지방 더비셔(Derbyshire)의 로즐리(Rodsley)에서 태어난 성 랄프 셔윈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하여 예술 석사 학위를 받았고, 1575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 두에(Douai)의 신학교로 가서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1577년에 사제가 된 후에도 로마에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1580년에 동료들과 함께 영국 선교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1580년 8월 1일 런던(London)에 당도했으나, 그해 11월 9일 설교하던 중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12월 4일 런던탑으로 이송되었다.

성 랄프 셔윈은 1년 동안 런던탑에 갇혀 회유와 고문을 당하다가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 1581년 12월 1일, 성 에드문두스 캠피온(Edmundus Campion)과 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Alexander Briant) 신부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랄프 셔윈은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12월 1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2000년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레온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eo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32년경? 프레쥐스

 

 

레온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온시우스, 레온씨오, 레온씨우스, 레온티오, 레온티우스.

 

 

레온시오 자료

성 레온티우스(또는 레온시오)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님(Nimes)에서 부유한 상류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고, 압트(Apt)의 주교인 성 카스토르(Castor, 9월 21일)와는 형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 프레쥐스에서 사제가 되었고, 곧이어 그곳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초대 주교로 보기도 한다.

그는 친구 사이인 성 호노라투스(Honoratus, 1월 16일)가 자신의 주교좌에서 멀지 않은 칸(Cannes) 앞바다의 사람도 살지 않는 한 황량한 섬(Saint-Honorat)에 수도원을 세우자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레랭(Lerins) 수도원의 시작이었다.

성 레온티우스는 교구 주교로서 레랭 수도원의 독립성을 보장하면서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마르세유(Marseille)에 정착해 성 빅토르(Victor) 수도원 등을 세운 성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 7월 23일)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성 요한 카시아누스는 수도자들의 관상 생활에 대해 다룬 자신의 첫 “담화집”(Conferences)을 성 레온티우스에게 헌정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1일 목록에 프레쥐스의 주교인 성 레온티우스에 관한 내용을 추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로가토

 

  • 가톨릭 성인 이름
    Rog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로가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가또, 로가뚜스, 로가투스.

 

 

로가토 자료

이탈리아 로마(Roma)의 순교자인 성 루키우스(Lucius), 성 로가투스(또는 로가토),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그리고 성녀 칸디다(Candida)에 대해 알려진 다른 내용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루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u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루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기오, 루치우스, 루키오, 루키우스.

 

 

루치오 자료

이탈리아 로마(Roma)의 순교자인 성 루키우스(또는 루치오), 성 로가투스(Rogatus),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그리고 성녀 칸디다(Candida)에 대해 알려진 다른 내용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리카르도 랭리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Langley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6년

 

 

리카르도 랭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랭리 자료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 랭리는 우즈토르프의 신사로 알려진 분인데, 그의 저택에서 사제들을 보호했다는 죄목으로 요크(York)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마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i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3년

 

 

마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리아누스.

 

 

마리아노 자료

성 디오도루스(Diodorus) 신부와 성 마리아누스(또는 마리아노) 부제는 누메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많은 로마(Roma)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들은 카타콤바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박해자들이 지하 성당의 입구를 막아버려 순교하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샤를 드 푸코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de Foucaul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8-1916년

 

 

샤를 드 푸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로,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푸꼬.

 

 

샤를 드 푸코 자료

성 샤를 외젠 드 푸코(Charles Eugene de Foucauld, 또는 샤를 드 푸코)는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여섯 살이 되던 1864년 부모를 차례로 잃고 고아가 되어 외조부인 드 모를레(De Morlet)에게 맡겨졌다. 

여기서 그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촌 누이 마리(Marie)를 만났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와 예수회가 운영하는 낭시(Nancy)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에 성실치 않아 성적이 부진했고 또 엄격한 규율 생활을 싫어해 기숙사를 도망쳐 나왔다. 그는 퇴학과 함께 신앙마저 잃고 16세 이후부터 세속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1876년 육군 사관학교와 1878년 기병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한 그는 로렌(Lorraine) 지방과 알제리 북동부 지역에서 복무하였다. 하지만 방탕하고 멋대로 행동하던 그는 1881년 계급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군대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닫고 제대한 후,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 탐험을 시작하였다. 그는 알제리(Algeria)의 수도인 알제(Alger)에서 1년간 그 지방 언어와 관습을 배운 뒤 사막에서 유대인 랍비의 시종으로 가장하고 2년 동안 생활하였다. 

탐험 생활 중 사막의 광활함에서 느낀 고독과 그 안에서 알라(Allah)신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무슬림의 순박하고 투철한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886년 10월 사촌누이로부터 소개받은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의 앙리 위블랭(Henri Hublin) 아빠스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고해성사를 보고 교회와 화해하면서 성체를 모셨다.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인 푸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도와 금욕의 삶을 시작했고, 위블랭의 지도를 받으며 봉쇄 생활을 하던 중 은수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

그는 1890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던 중 나자렛에서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여 마리 알베릭(Marie-Alberic)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곧 시리아에 있는 아크베(Akbes)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의 허름한 거처에서 1896년까지 지냈다. 

1892년 수도서원 후 절대적인 청빈과 자기희생, 절제와 고독을 추구하던 그는 1896년 알제리의 스트라우엘리(Straoueli) 수도원을 옮겼다. 늘 더 큰 고독과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트라피스트회를 떠나 1897년 팔레스티나의 나자렛으로 가서 클라라회 수녀원의 문지기로 살며 1900년까지 밤낮으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의 생활은 가장 비천한 노동, 경건한 독서, 성경 공부, 기도로 이어졌다. 나자렛에서 스승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자신의 성소를 확인한 그는 1900년 파리(Paris)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사제품을 준비한 후 1901년 6월 6일 프랑스 남부 비비에(Viviers)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성 샤를 드 푸코는 수많은 사람이 영적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모로코(Morocco)에 이끌려 모로코와 알제리 국경 근처 베니 수도원(Beni-Abbes)의 은수처로 들어갔다. 

그는 사막의 무슬림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는데, 그 방법은 설교가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관상과 사랑의 삶을 통해서 자신 스스로 ‘보편적 형제’인 하느님의 사람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과정은 후에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예수 성심의 형제회’(La Fratermite du Sacre-Coeur de Jesus)라고 이름 붙인 은수처에서 늘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동안 조배를 했다. 

1905년 그는 사하라 사막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알제리 남부의 도시인 타만라세트(Tamanrasset) 근처 아하가르(Ahaggar 또는 호가르 Hoggar) 산지에서 가장 높은 아세크렘(Assekrem)에 은수처를 마련한 후, 그곳에서 11년 동안 생활하면서 선교사들이 올 때를 대비하였다. 

그는 투아레그족(Tuareg)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의 관습과 언어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문학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프랑스-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모든 능력과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섬기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유럽으로 돌아가 군종신부나 위생병으로 참여할 것을 생각했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의무임을 깨달아 아프리카에 남았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원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혼란의 와중에 약탈을 위해 쳐들어온 호전적 무슬림인 사누시파(Sanusi)에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들을 막으러 프랑스 군인들이 나타나자 성 샤를 드 푸코를 지키던 한 젊은이가 당황한 상태에서 그의 머리에 총을 쏘고 말았다. 12월 1일 타만라세트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로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의 영적 여정을 마무리했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투아그레족에 의해 무슬림과 함께 인근에 묻혔다가 1년 뒤에 도착한 프랑스군의 장군에 의해 도랑에서 발견되어 조금 떨어진 곳에 매장하였다. 

그리고 1928년에 평소 성 샤를 드 푸코 신부의 뜻과는 달리 프랑스 군대가 주둔해 있던 알제리 중부의 오아시스 도시로 오늘날 엘메니아(El Menia)로 불리는 엘골레아(El Golea)에 옮겨져 재매장하였다.

성 샤를 드 푸코 신부가 사막에서 죽은 후 그의 영적인 영향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는 사막에서의 고적한 삶을 통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깨닫는 행복을 누렸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비그리스도교 대중 안으로 파고들어 간 선구자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비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안에서 자신의 복음적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며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사막의 은수자’ 또는 ‘사하라의 사도’라고도 부른다. 그의 좌우명은 ‘예수 사랑’(Jesus Caritas)이란 두 단어였다.

그는 생전에 제자를 두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에 영향을 받은 이들에 의해 ‘예수의 작은 형제회’(Little Brothers of Jesus, 1933년)와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Little Sisters of Jesus, 1939년)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성 샤를 드 푸코 신부가 행한 새로운 형식의 관상 기도가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세속에 살며 실천하는 관상 생활로 침묵 중에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복음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사도직이다. 그래서 그들은 빈민 지역이나 공장이라는 ‘사막’으로 가서 덕과 관상 기도의 모범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2005년 11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22년 5월 15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5만여 명의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다른 9위의 복자와 함께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아나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Anani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르벨라

 

 

아나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니아스, 아나니야, 하나니아스, 하나니야, 하난야.

 

 

아나니아 자료

성 아나니아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페르시아의 아르벨라 또는 아시리아(Assyria)의 에르벨(Erbel)에서 순교한 평신도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아제리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ger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21-588년 베르됭

 

 

아제리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게리코, 아게리쿠스, 아제리꼬, 아제리꾸스, 아제리쿠스.

 

 

아제리코 자료

성 아제리쿠스(또는 아제리코)는 프랑스 베르됭의 하르빌 태생으로 그곳의 성 베드로(Petrus)와 바오로(Paulus) 성당의 성직자로 활약하던 중, 33세 때에 성 데시데리우스(Desiderius)를 계승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곳을 둘러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와 성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Venantius Fortunatus, 12월 14일)로부터 탁월한 주교라는 격찬을 받았다.

그는 또 국왕 시제베르트 1세와 그의 아들 칠데베르트를 개종시켰고, 그들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성 안드레아(Andreas)와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에어리(Airy)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안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ns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시에나

 

 

안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사누스, 안싸노, 안싸누스.

 

 

안사노 자료

로마(Rom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안사누스(또는 안사노)는 시에나의 사도로 불리며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하녀이자 보모인 로마의 성녀 막시마(Maxima, 9월 2일)에게 비밀리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양육되었다. 

성 안사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공공연히 자신의 신앙을 선포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신앙을 포기하라는 강요와 심지어 당국에 고발까지 하는 등 박해를 받아 성녀 막시마와 함께 체포되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녀 막시마는 죽을 때까지 모진 매를 맞아 로마에서 순교했고, 성 안사누스는 다행히도 잔혹한 매질과 뜨거운 기름 가마에 던져지는 형벌에도 살아남아 죄수로서 시에나로 압송되었다.

그는 로마를 떠나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시에나로 가는 길에 타오르는 열정을 이기지 못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특히 그는 시에나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어 ‘세례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시에나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참수되어 머리는 성곽 밖으로 내던져졌다고 전해 온다. 그의 유해는 순교 후 도파나(Dofana)로 불리는 곳에 묻혔다가 1107년 시에나 대성당에 모셔졌고 때때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성 안사누스는 시에나의 네 명의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14세기 초, 시에나 출신 화가 두초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가 시에나의 주교좌성당에 제작해 설치한 마에스타(Maesta)에는 시에나의 네 수호성인이 성모자 양옆의 여러 성인 중에서 가장 앞줄에 무릎 꿇고 성모자를 경배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왼쪽부터 성 안사누스 순교자, 성 사비누스(Sabinus, 12월 30일) 주교 순교자,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9월 14일) 순교자, 성 빅토르(Victor, 5월 14일) 순교자 순으로 그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안토니오 본파디니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Bonfadin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400-1482년

 

 

안토니오 본파디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오 본파디니 자료

이탈리아 페라라(Ferrara)의 좋은 가문 출신인 안토니우스 본파디니(Antonius Bonfadini, 또는 안토니오)는 31세 때에 고향 마을에 있던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즉시 뛰어난 설교자이자 교사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성지로 가는 프란치스코회 선교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연만한 나이에 선종하여 로마냐(Romagna)의 코티뇰라(Cotignola)에 묻혔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1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Brian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6-1581년 영국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 자료

영국 잉글랜드의 서머싯(Somerset)에서 태어난 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는 옥스퍼드(Oxford)의 하트퍼드 대학(Hertford College)에서 공부하다가 가톨릭 신자로 개종하였다. 

대학을 떠난 그는 자유롭게 공부하기 위하여 프랑스 랭스(Reims)의 영국 대학에 들어갔고, 이어서 두에(Douai)의 영국 대학에서 수학한 후 1578년 3월 사제품을 받았다. 

다음 해에 선교사로서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고향인 서머싯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다가 1581년에 런던으로 갔다. 그리고 그해 4월 28일 로버트 퍼슨스(Robert Persons) 신부의 집에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여기서 영국 국교도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서약을 하라는 위협에도 끝까지 견디어냈다. 런던탑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는 잉글랜드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내 입회를 청원했다. 

결국 그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과 성 랄프 셔윈(Ralph Sherwin) 신부와 함께 12월 1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12월 1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에드문도 캠피언

 

  • 가톨릭 성인 이름
    Edmund Campi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40-1581년 영국

 

 

에드문도 캠피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드먼드, 에드몬드, 에드문두스, 에드문드, 켐피온.

 

 

에드문도 캠피언 자료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또는 에드문도)은 1540년 1월 25일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에서 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나 가톨릭 신자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553년 8월 3일 여왕 메리 튜더(Mary Tudor)의 런던 입성을 환영하는 연설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는 불과 15세의 나이에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Oxford)의 세인트 존스 대학(St. John’s College)에 들어갔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 당시 석학이었던 레스터(Leicester)의 얼(Earl),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심지어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까지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영국 교회에 대한 지상권(至上權)을 승인하는 선서(Oath of Supremacy)를 하고 1564년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영국 성공회의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제품을 준비하며 교부들의 문서를 공부하던 중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신앙의 진리를 깨달으면서 내적인 갈등을 겪고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섰다. 그는 1569년에 옥스퍼드를 떠나 아일랜드로 건너가 공부를 이어갔다.

교황 비오 5세(Pius V)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단죄하면서 영국 내에서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571년 6월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은 비밀리에 아일랜드를 떠나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인 잉글랜드 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고 그동안 부인했던 성체성사에 참여했다. 1573년 1월 학위를 받은 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고, 그해 4월 입회 허락을 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예수회가 아직 잉글랜드에 진출하기 전이라 그는 오스트리아 관구로 가서 프라하(Praha)와 브르노(Brno) 공동체에서 수련기를 보냈다. 그 후 부제품을 받고, 1578년에 프라하의 대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첫서원 이후 6년 동안 프라하의 예수회 대학에서 수사학과 철학 교수로도 활동했다.

1579년 예수회의 잉글랜드 진출이 확정되자 그는 1580년 3월 프라하를 출발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로버트 퍼슨스(Robert Persons) 신부와 동료들을 만나 잉글랜드로 가는 첫 번째 예수회 선교단의 일원이 되어 6월 24일 런던에 도착했다. 

그의 존재는 곧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당국에도 알려졌다. 런던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는 자신이 잉글랜드로 돌아온 것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종교적 목적이라는 취지의 선언문(Campion’s Brag)를 작성해 신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는 주로 버크셔, 옥스퍼드셔, 랭커셔, 요크셔 등지에서 활동했다. 1581년 5월 그는 “열 개의 이유들”(Decem Rationes)이란 책을 출판하기 위해 잠시 런던에 들렀다가 7월에 다시 런던을 떠났다. 그는 노퍽(Norfolk)으로 가던 중 잠시 옥스퍼드 근교 라이포드 그레인지(Lyford Grange)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7월 22일 런던탑에 갇힌 그는 가톨릭 신앙을 버릴 마지막 기회를 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해 11월 그는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에서 ‘로마와 랭스 음모 사건’(Rome and Rheims Plot)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음모는 사실이 아니라 조작된 것으로 로마와 랭스에서 가톨릭 관련자들이 선동을 일으켜 여왕을 폐위시킬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81년 12월 1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Alexander Bryant)와 성 랄프 셔윈(Ralph Sherwin) 신부와 함께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은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12월 1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에바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v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아스티

 

 

에바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바시우스.

 

 

에바시오 자료

성 에바시우스(또는 에바시오)는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아스티의 초대주교이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에 의해 주교좌에서 쫓겨나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의 카살레몬페라토(Casale Monferrato)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엘리지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lig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88-660년 누아용

 

 

엘리지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로이, 엘리기오, 엘리기우스, 엘리지우스.

 

 

엘리지오 자료

엘로이(Eloi)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성 엘리기우스(또는 엘리지오)는 프랑스계 로마인의 아들로서 프랑스의 리모주(Limoges) 근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에우케리우스(Eucherius)는 금속 세공인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유명한 금 세공인인 압보(Abbo)에게 아들을 보내어 공부하도록 안배하였다. 압보는 리모주의 조폐국 책임자였다. 그가 도제 수업을 마친 뒤에는 궁중 재무관 봅보(Bobbo) 수하에서 일을 하다가 국왕 클로테르 1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성 엘리기우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한편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성 엘리기우스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수많은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납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또 632년에 그는 솔리냑(Solignac)에 수도원을 세웠고, 클로테르의 아들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의 도움으로 파리(Paris)에 수도원까지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그래서 국왕은 그를 자신의 주요 고문으로 삼았다.

또 엘리기우스는 브르타뉴(Bretagne)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활약한 결과 브르타뉴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그는 640년에 서품되어 누아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투르네(Tournai)의 주교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에 안트베르펜(Antwerpen)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세공 기술자, 대장장이, 모든 금속 장인들의 주보성인이며, 택시 운전기사들도 주보로 모시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올림피아데

 

  • 가톨릭 성인 이름
    Olympiad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집정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로마

 

 

올림피아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올림삐아데스, 올림피아데스.

 

 

올림피아데 자료

성 올림피아데는 로마의 집정관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 신앙을 지키다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아멜리아(Amelia)에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205-1283년 베르첼리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이탈리아 베르첼리 근방 모소 산타 마리아(Mosso Santa Maria)에서 태어난 요한 가르벨라(Joannes Garbella)는 40세 때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베르첼리에서 도미니코회의 원장으로 재직하면서부터 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직책을 거쳐 1264년에 선교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어 19년 동안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편지나 공문서에서 ‘가난한 작은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수도자들을 항상 동료로 부를 만큼 겸손하였다.

리옹(Lyon) 공의회에서 그는 히에로니무스 디 아스콜리(Hieronymus di Ascoli)를 만났는데,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총장을 역임했던 그 당시의 고위 성직자였다.

또한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뛰어난 신심을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는 그를 지원하여 이 신심의 보급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는 모든 도미니코회 성당에는 예수 성명 제대를 꾸미도록 하였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의 학식을 반박하는 사람들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자기 회원들을 영국으로 파견한 적도 있다.

1283년 11월 30일 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선종한 그에 대한 공경은 1903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요한 베슈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Bech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39년 영국

 

 

요한 베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체,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베슈 자료

요한 베슈(Joannes Beche)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진 토마스 마샬(Thomas Marshall)은 잉글랜드 콜체스터(Colchester)의 베슈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Oxford)의 한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1515년에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그는 체스터(Chester)의 성녀 베르부르가(Werburga) 수도원(오늘날의 체스터 주교좌성당)의 제26대 수도원장으로 부임했고, 1530년 6월 10일 콜체스터의 성 요한 세례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1534년 국왕 헨리 8세(Henry VIII)가 영국에서 교회에 대한 최고 권한이 국왕에게 있다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반포했을 때, 많은 성직자는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일시적 문제로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 수도승들은 영적인 문제가 아닌 세속적인 면에서 한시적으로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수장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의 수장령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던 요한 베슈는 1935년 친구이자 평소 흠모하던 성 요한 피셔(John Fisher) 추기경이 6월 22일,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7월 6일에 수장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순교하자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고, 이런 사실은 정부에도 보고되었다. 

1538년 11월, 그는 수도원을 몰수하려는 왕실 위원회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왕의 정책에도 반대를 분명히 했다. 결국 그는 반역죄 혐의로 런던탑에 갇혔고, 다시 콜체스터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고 그해 12월 1일 수도원 영지에 세운 교수대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한 베슈는 1895년 5월 13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에식스(Essex)의 브렌트우드(Brentwood) 교구에서 순교일인 12월 1일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요한 베슈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우르시치노

 

  • 가톨릭 성인 이름
    Ursic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47년 브레시아

 

 

우르시치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우르시치누스, 우르시키노, 우르시키누스.

 

 

우르시치노 자료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브레시아의 주교인 성 우르시키누스(또는 우르시치노)는 347년 사르디카(Sardica)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아리우스파(Arianism) 이단의 반대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지금도 브레시아에 모셔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카스트리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astri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37년 밀라노

 

 

카스트리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스트리시아노, 가스트리시아누스, 카스뜨리씨아노, 카스뜨리씨아누스, 카스트리시아누스, 카스트리티아노, 카스트리티아누스.

 

 

카스트리시아노 자료

성 카스트리티아누스(Castritianus, 또는 카스트리시아노)는 성 칼리메리우스(Calimerius, 7월 31일) 주교의 전임자로서 42년간 이탈리아의 밀라노 교구를 돌보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카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ass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카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시아노, 가시아누스, 카시아누스, 카시안, 카씨아노, 카씨아누스.

 

 

카시아노 자료

이탈리아 로마(Roma)의 순교자인 성 루키우스(Lucius), 성 로가투스(Rogatus),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또는 카시아노) 그리고 성녀 칸디다(Candida)에 대해 알려진 다른 내용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프로쿨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rocu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42년 나르니

 

 

프로쿨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로꿀로, 쁘로꿀루스, 프로쿨루스.

 

 

프로쿨로 자료

이탈리아의 나르니 또는 테르니(Terni)의 주교인 성 프로쿨루스(또는 프로쿨로)는 동고트의 왕 토틸라(Totila)의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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