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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남자세례명 18가지

피어나네 2023. 12.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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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갈가노, 루치오, 마우로, 미로클레, 비리노, 빅토르, 스바니야, 스테파노, 아그리콜라, 암비코, 야손, 요한, 율리오, 카시아노, 크리스피노, 클라우디오 (순교자), 클라우디오 (호민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총 18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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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여자세례명 마지나, 힐라리아,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2월 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8가지

 

 

 

 

12월 3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갈가노

  2. 루치오

  3. 마우로

  4. 미로클레

  5. 비리노

  6. 빅토르

  7. 스바니야

  8. 스테파노

  9. 아그리콜라

  10. 암비코

  11. 야손

  12. 요한

  13. 율리오

  14. 카시아노

  15. 크리스피노

  16. 클라우디오 (순교자)

  17. 클라우디오 (호민관)

  18.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2월 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8가지

 

 

1. 갈가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alg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48-1181년

 

 

갈가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갈가누스, 구이도티, 귀도티, 기도티.

 

 

갈가노 자료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지방 시에나(Siena)의 치우스디노(Chiusdino)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성 갈가누스 구이도티(Galganus Guidotti, 또는 갈가노)는 젊은 시절 화려한 세속적 생활에 이끌렸지만 회심한 후 토스카나의 몬테시에피(Montesiepi)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회심은 성 미카엘 대천사의 방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성 미카엘 대천사의 환시를 본 후 그는 칼을 내리쳐서 바위가 갈라진다면 이전의 생활을 포기하겠다고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칼을 들어 바위를 내리치자 칼날이 부러질 것을 기대했던 그의 뜻과는 달리 오히려 칼의 손잡이 부근까지 돌에 깊이 파묻혀버렸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칼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은수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오늘날 로톤다 디 몬테시에피(Rotonda di Montesiepi)라 불리는 은수처에서 일생을 보내고 하느님 품에 안긴 그는 1185년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u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경 영국

 

 

루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기오, 루치우스, 루키오, 루키우스.

 

 

루치오 자료

교황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재위 174-189년, 5월 26일)의 이름으로 기록된 한 문서에서 성 루키우스(또는 루치오)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교황은 영국의 왕인 성 루키우스로부터 서찰을 받았는데, 그는 국민에게 명을 내려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칙서를 내렸다. 그래서 그는 교황에게 선교사를 요청한 것이다.

교회사가인 성 베다(Beda) 역시 이 편지가 진실임을 입증하면서 인용하고 있다. 또 이 이야기는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 지방에 널리 알려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우로

 

  • 가톨릭 성인 이름
    Mau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3년경

 

 

마우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오로, 마우루스.

 

 

마우로 자료

누메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서 성 크리산투스(Chrysanthus)와 성녀 다리아(Daria, 이상 10월 25일) 부부가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통해 많은 로마인을 그리스도교 개종시켰는데, 그중에는 군인들이 특히 많았다. 당시 호민관이었던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이 사실을 듣고 성 크리산투스를 체포해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고문을 받는 동안 성 크리산투스와 성녀 다리아가 보여준 용기와 믿음에 감동해 그와 그의 아내인 성녀 힐라리아(Hilaria)와 아들인 성 야손(Jason)과 성 마우루스(또는 마우로) 그리고 70명의 군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성 클라우디우스의 개종으로 분노한 황제는 큰 돌을 그의 목에 묶은 뒤 강에 던져 익사시켰다.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성 클라우디우스에 이어 그의 두 아들과 70명의 군인도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되었다. 그의 아내인 성녀 힐라리아는 두 아들의 시신을 순교한 곳 근처 동굴에 묻고 장례를 지낸 뒤 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던 중 이교도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주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시신은 여종들에 의해 수습되어 아들들 옆에 묻혔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성 클라우디우스 가족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역사적 자료의 미비함과 전승의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더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미로클레

 

  • 가톨릭 성인 이름
    Mirocl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18년 밀라노

 

 

미로클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로끌레스, 메로클레스, 미로끌레스, 미로클레스.

 

 

미로클레 자료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인 성 미로클레는 암브로시우스 성가와 전례의 창시자 중의 한 명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313년 로마(Roma)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칭송하였다. 그는 메로클레(Merocle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비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Bi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650년 도체스터

 

 

비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리누스.

 

 

비리노 자료

'웨식스의 사도'로 불리는 성 비리누스(또는 비리노)는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I)의 명에 따라 잉글랜드(England) 내륙지방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로마(Roma)에 온 제노바(Genova)의 주교였는데, 뜻밖에도 웨식스(Wessex) 사람들을 발견하고부터는 이들을 위하여 일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634년에 영국으로 가서 선교하던 중 웨식스 왕에게 세례를 주었고, 왕이 하사한 템스(Thames)의 도체스터에 주교좌를 세웠다. 성 베다(Beda)에 의하면 그는 독일계 주교이다.

도체스터 교구는 나중에 둘로 나누어서, 윈체스터(Winchester) 지역은 성 헤다(Hedda, 7월 7일)가 맡았다. 성 헤다는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의무를 수행할 때에는 사랑의 눈빛이 더욱 빛났다고 성 베다는 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빅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빅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자료

성 암비쿠스(Ambicus), 성 빅토르, 성 율리우스(Juli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지방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순교록 역시 그들의 이름만 간단히 전해주고 있을 뿐 다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스바니야

 

  • 가톨릭 성인 이름
    Zephania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세기BC

 

 

스바니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소포니아스, 스바냐, 스바니아, 제퍼나이어.

 

 

스바니야 자료

스바니야(그리스어와 라틴어 Sophonias)라는 이름은 '야훼가 숨겨 주다' 또는 '피신시켜 주다'라는 뜻이다. 이 예언자의 이름은 길고도 특이한 족보 끝에 나오는데, 그의 선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다.

성 스바니야가 설교한 연대는 요시아 시대(1,1), 그러니까 기원전 640~630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리고 설교내용을 보면, 요시아 왕(王)이 개혁을 시행하기 전의 예루살렘의 주변상황을 잘 살필 수 있으니, 당시 아시리아제국의 세력은 아주 대단해서, 유다의 조정이나 백성의 신앙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그리고 아시리아의 천체숭배 사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아시리아제국도 유다왕국의 조정대신들을 마음대로 임면(任免)할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1,8).

또한 암몬인들이 숭배하던 신 밀콤(Milkom) 숭배, 가나안의 토속신앙(1,4 · 5), 외국 문물(1,8),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3,4), 폭력과 사회불의(1,11; 3,1-3) 등 숱한 폐풍(弊風)이 만연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바니야는 이러한 여건 하에서도 성전(聖殿) 주위에 경건하게 머무르며(1,7 · 9; 3,5),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사람들의 모습을 비쳐주고 있다(2,3; 3,12 · 13).

이와 같이 개혁을 열망한 그 저편에는, 당시 급변하던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루살렘의 정권교체가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예언자의 정치관이 깔려 있다. 스바니야는 당시 성전 주위의 경건한 사람들이 숱한 폐풍의 책임을 아슈르와 니느웨라는 큰 두 성을 다스리던 아시리아제국에 돌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예언서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집트는 지중해 연안에 출몰하며 괴롭히던 식트(Scythes)족을 물리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카젤(Cazelles) 교수는 "스바니야가 자기 예언서 안에서 이집트의 26대 왕 프사메틱(Psametique 1세)이 팔레스티나로 원정(기원전 650)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며, 이 원정으로 인해 아시리아가 멸망하고 예루살렘의 정권이 교체되어 이스라엘이 구원되기를 염원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스바니야서도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다. 스바니야는 죄악이 교만에서 연유한다고 규정하고(2,10 · 15; 3,11), 그 죄악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밀어닥칠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그 재앙이란 바로 원수의 침략이다.

그러나 스바니야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죄악과 원수의 침공보다 미구에 다가올 하느님의 엄중한 처벌이다. 여기서 스바니야는 아모스가 천명한 바 있는 ‘주님의 날’이라는 주제를 다시 들고 나온다. 그러나 주님의 날에 벌어진 비극의 폭(幅)을 아모스보다 훨씬 넓게 확대시켰다.

다시 말해 우주전체가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멸될 때 이스라엘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 주님의 날을 목전에 둔 비통한 음률은 그리스도교의 장례미사 노래(Dies Irae)뿐 아니라 괴테의 파우스트에까지 스며 있다.

그러나 비록 비극의 예고로 점철된 메시지지만 마지막 일말의 희망까지 말살시키지는 않았으니, 이는 스바니야가 소수의 '남은 자'에게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남은 자란 재앙에서 구원될 '땅의 가난한 사람들'이다(2,3). 그는 사회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성적인 차원에서 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즉 그들은 주님을 찾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굴종과 겸손의 뜻이 내포된 '아나와'(anawah)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스바 3,11-12에 와서는 이 단어의 의미가 다소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즉 '가난하고'(ani, 아니) '비참한'(dal, 달) 이 백성은 주님에게 달려들어 피신처를 찾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거만한 사람들로서 뽐내기를 좋아하고 거짓과 불의에 젖은 사람들이다.

스바니야서는 가난에 대한 사상이 점차 깊이 있게 전개되고 있다. 이 예언에서 말하는 가난이라는 말에는 물질적인 의미뿐 아니라 내적 영성적 의미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가난은 부침(浮沈)이 많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생명과 구원의 관건이 되는 인간의 근본적 자세로 간주되어 왔다.

다시 말해 인간은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연명해 나가는 비참한 존재임을 하느님 앞에서 인정하며 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바니야는 '남은 자'를 '시온의 딸'(3,14-18)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패망하자 그 곳 백성들이 유다로 월남하여 수도 예루살렘의 어느 한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시온의 딸이 바로 이 새 정착민인 것 같다. 스바니야는 이 정착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왜냐하면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패망하여 그 곳 형제들이(2열왕 17,6) 사마리아제국으로 유배 갔지만, 그 제국은 멀지 않아 멸망할 것이며 아수르바니팔(Assurbanipal)의 세력도 약화일로에 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시온이 성전 주위에 머무르며 하느님과 가까이 있으니 그들이 시온의 성전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것은 월남하여 피난 온 덕분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너희 가운데 계시다."(3,5 · 15 참조)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스바니야가 본 희망의 공동체가 지닌 특징을 살펴보자. 이 공동체는 물질적으로 빈곤에 시달리고 또 소수의 무리에 지나지 않지만, 불의한 재산은 탐하지 않는 초탈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심을 믿고 의지하며, 역경 가운데도 하느님 승리의 표징을 찾을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진 공동체이다.

이 가난한 공동체는 오늘날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온의 딸아 기뻐 소리쳐라"(3,14)는 스바니야의 환호성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루가 1,28)라는 신약성서의 서두를 장식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스테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tephe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스테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크리스피누스(Crispinus), 성녀 마기나(Magina), 성 요한(Joannes),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가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의 이름 외에 다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는데, 역사적 사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는 더는 그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아그리콜라

 

  • 가톨릭 성인 이름
    Agricol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그리콜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그리꼴라.

 

 

아그리콜라 자료

판노니아(Pannonia, 도나우강 중류 우안(右岸)의 헝가리 분지 지역)에서 순교한 성 아그리콜라는 고대의 모든 순교록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나 그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암비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mb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암비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암비꼬, 암비꾸스, 암비쿠스.

 

 

암비코 자료

성 암비쿠스(또는 암비코), 성 빅토르(Victor), 성 율리우스(Juli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지방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순교록 역시 그들의 이름만 간단히 전해주고 있을 뿐 다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야손

 

  • 가톨릭 성인 이름
    Jas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3년경

 

 

야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자손.

 

 

야손 자료

누메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서 성 크리산투스(Chrysanthus)와 성녀 다리아(Daria, 이상 10월 25일) 부부가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통해 많은 로마인을 그리스도교 개종시켰는데, 그중에는 군인들이 특히 많았다. 당시 호민관이었던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이 사실을 듣고 성 크리산투스를 체포해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고문을 받는 동안 성 크리산투스와 성녀 다리아가 보여준 용기와 믿음에 감동해 그와 그의 아내인 성녀 힐라리아(Hilaria)와 아들인 성 야손과 성 마우루스(Maurus) 그리고 70명의 군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성 클라우디우스의 개종으로 분노한 황제는 큰 돌을 그의 목에 묶은 뒤 강에 던져 익사시켰다.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성 클라우디우스에 이어 그의 두 아들과 70명의 군인도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되었다.

그의 아내인 성녀 힐라리아는 두 아들의 시신을 순교한 곳 근처 동굴에 묻고 장례를 지낸 뒤 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던 중 이교도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주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시신은 여종들에 의해 수습되어 아들들 옆에 묻혔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성 클라우디우스 가족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역사적 자료의 미비함과 전승의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더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크리스피누스(Crispinus), 성녀 마기나(Magina), 성 요한(Joannes), 성 스테파누스(Stephanus)가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의 이름 외에 다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는데, 역사적 사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는 더는 그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율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율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우스, 줄리어스.

 

 

율리오 자료

성 암비쿠스(Ambicus), 성 빅토르(Victor), 성 율리우스(또는 율리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지방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순교록 역시 그들의 이름만 간단히 전해주고 있을 뿐 다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카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ass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8년 탕헤르

 

 

카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시아노, 가시아누스, 카시아누스, 카시안, 카씨아노, 카씨아누스.

 

 

카시아노 자료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또는 카시아노)는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속한 항구도시인 탕헤르에 주둔하던 로마군의 백인대장인 성 마르첼루스(Marcellus, 10월 30일)의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 법정의 기록관이었다.

그는 성 마르첼루스에게 내려진 부당한 사형선고에 반대하며 펜을 내려놓고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여 체포되었다. 감옥에 갇힌 그는 성 마르첼루스가 순교하고 한 달여가 지난 298년 12월 3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 또한 그가 오랜 기간 기록관 생활을 하다가 하늘의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인을 학살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가증스러운 일임을 깨달아 자기 직위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오늘날 속기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크리스피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risp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크리스피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크리스삐노, 크리스삐누스, 크리스피누스, 크리스핀.

 

 

크리스피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크리스피누스(Crispinus, 또는 크리스피노), 성녀 마기나(Magina), 성 요한(Joannes), 성 스테파누스(Stephanus)가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의 이름 외에 다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는데, 역사적 사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는 더는 그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클라우디오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Clau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클라우디오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오 (순교자)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성 클라우디우스(또는 클라우디오), 성 크리스피누스(Crispinus), 성녀 마기나(Magina), 성 요한(Joannes), 성 스테파누스(Stephanus)가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의 이름 외에 다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는데, 역사적 사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는 더는 그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클라우디오 (호민관)

 

  • 가톨릭 성인 이름
    Clau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호민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3년경

 

 

클라우디오 (호민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오 (호민관) 자료

누메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서 성 크리산투스(Chrysanthus)와 성녀 다리아(Daria, 이상 10월 25일) 부부가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통해 많은 로마인을 그리스도교 개종시켰는데, 그중에는 군인들이 특히 많았다. 당시 호민관이었던 성 클라우디우스(또는 클라우디오)는 이 사실을 듣고 성 크리산투스를 체포해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고문을 받는 동안 성 크리산투스와 성녀 다리아가 보여준 용기와 믿음에 감동해 그와 그의 아내인 성녀 힐라리아(Hilaria)와 아들인 성 야손(Jason)과 성 마우루스(Maurus) 그리고 70명의 군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성 클라우디우스의 개종으로 분노한 황제는 큰 돌을 그의 목에 묶은 뒤 강에 던져 익사시켰다.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성 클라우디우스에 이어 그의 두 아들과 70명의 군인도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되었다.

그의 아내인 성녀 힐라리아는 두 아들의 시신을 순교한 곳 근처 동굴에 묻고 장례를 지낸 뒤 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던 중 이교도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주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시신은 여종들에 의해 수습되어 아들들 옆에 묻혔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성 클라우디우스 가족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역사적 자료의 미비함과 전승의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더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Xavi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06-1552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사베리오, 사베리우스, 사비에르,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자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us Xavier/Javier, 라틴어 Franciscus Xaverius 프란치스쿠스 사베리우스 또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1506년 오늘날의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방(Basque Provinces)의 팜플로나(Pamplona) 교외에 있는 하비에르 가족성(城)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집안은 나바라(Navarra) 왕국의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그러나 1512년 에스파냐의 침공으로 나바라 왕국 대부분이 점령당하면서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가문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계속되는 독립 전쟁 속에서 자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열아홉이 되던 1525년에 몰락한 가문을 살리기 위해 프랑스 파리(Paris)로 갔다.

그는 명문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1529년에 프랑스 사부아(Savoie) 출신의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1일)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해 10월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도 그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같은 지방 출신인 성 이냐시오는 과거 전쟁 중에 그와 반대편인 에스파냐를 위해 싸운 적이 있었다. 나이가 많은 성 이냐시오는 그가 사제가 되기를 바랐지만, 몰락한 가문을 세우기 위해 세속적 출세를 열망하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설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도 생각을 바꾸어 예수회의 설립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들은 1534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파리(Paris)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에 있는 생 드니(Saint Denis, 오늘날의 Saint Pierre de Montmartre) 성당의 지하 묘소에서 서원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정결과 청빈 서원을 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선교 활동에 헌신하기로 서원했다.

그는 성 이냐시오와 다른 4명의 회원과 함께 1537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다음 해에 로마(Roma)로 파견되었다. 당장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기가 불가능해지자 그와 동료들은 선교에 대해 교황에게 순명하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해 교황의 승인을 받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에 의해 예수회의 탄생이 승인되었다. 예수회가 성좌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은 해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z) 신부와 함께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인도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에서 발이 묶였다. 포르투갈의 국왕 후안 3세(Juan III)가 로드리게스 신부는 남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8개월을 하릴없이 지내다가 1541년 4월 7일에야 떠날 수 있었는데, 이때는 교황으로부터 인도의 교황대사 자격을 부여받은 뒤였다.

그는 13개월 후에 인도 중서부 고아(Goa)에 도착했고, 5개월 동안은 병자와 죄수들을 찾아보는 일과 어린이의 신앙교육 및 그곳에 있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비도덕성을 바로잡는 일에 착수했다. 그 후 그는 인도의 남단 타밀나두(Tamil Nadu)에 있는 코모린 곶(Cape Comorin)에서 3년을 지내면서 파라바족(Paravas)을 사목하여 수천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1545년에 그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cca)를 찾아갔고, 1546년부터 1547년까지는 뉴기니(New Guinea)와 인접한 몰루카(Molucca) 제도와 필리핀과 가까운 모로타이(Morotai) 섬을, 1549년부터 1551년에는 일본까지 왕래하며 왕성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551년 12월 일본에서 몰루카로 돌아온 그는 2년 전에 도착한 편지 두 통을 받았는데, 그 한 통에는 그가 ‘인도와 그 너머의 나라들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는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고, 산타 크루즈호를 타고 안토니우스(Antonius)라는 중국인 청년과 함께 출발해 광둥항(廣東港)이 바라보이는 산첸(上川, 샹추안) 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광둥항으로 들어가는 배를 수소문하던 중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3일, 중국 본토까지 불과 14km의 뱃길을 남겨두고 산첸 섬에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산첸 섬에 묻혔다가 포르투갈을 거쳐 인도 고아의 봄 예수 성당(Basilica of Bom Jesus)으로 옮겨 은관에 담아 안치하였다.

흔히 그는 사도 성 바오로(Paulus)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그가 개종시킨 교우 수만 해도 1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도의 사도’ 또는 ‘일본의 사도’로 불린다.

그는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바로 이어서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그를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일)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나바라 출신으로 성 이냐시오의 첫 동료이자 예수회 신부로서 인도, 몰루카 제도, 일본에서 수많은 사람을 개종시키고 중국을 향하던 중 질병으로 지쳐 선종했다고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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