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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피나 바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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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피나 바키타 여자세례명 목록
- 요세피나 바키타 (2월 8일)
1. 요세피나 바키타
- 세례명 축일
2월 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ine Bakhita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869-1947년
요세피나 바키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셉피나, 조세피나, 조세핀.
요세피나 바키타 이야기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a Bakhita)는 1869년 오늘날의 아프리카 수단(Sudan) 서부에 있었던 다르푸르술탄국(Sultanate of Darfur)의 다르푸르(Darfur) 지역 올고사(Olgossa)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다주족(Daju people) 출신인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의 아버지는 존경받는 부자로 다주족 족장의 동생이었다. 그녀는 형제자매와 함께 근심 걱정 없는 다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랍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고통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녀는 엘오베이드(El Obeid)와 오늘날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Khartoum) 노예 시장에서 8년 정도의 기간에 대략 다섯 번이나 노예로 팔리고 다시 팔리는 굴욕과 고통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납치의 트라우마로 인해 부모님이 준 이름조차 잊어버렸고, 노예 상인들이 지어 준 아랍어로 ‘행운 또는 행복’을 뜻하는 ‘바키타’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의 뜻과는 달리 주인의 폭력과 잔혹한 대우로 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녀를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튀르키예 군대의 장교에게 팔려 갔을 때 그녀의 몸에 새기는 일종의 문신이었다. 주인은 칼로 살을 파고 소금을 뿌려 성녀 바키타의 몸에 표식을 새겼는데, 그로 인해 그녀의 몸에는 백 개가 넘는 흉터가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83년 이탈리아 공사(公使) 칼리스토 레냐니(Callisto Legnani)에게 팔리면서 그녀의 운명도 바뀌게 되었다. 처음으로 욕설이나 매질이 아닌 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그녀는 영사 관저에서 평화와 따뜻함 그리고 기쁨을 체험했다.
2년 후 정치적 상황으로 칼리스토 레냐니 공사가 이탈리아로 떠나야 했을 때 그녀는 같이 가게 해달라고 청했고, 공사는 자기 친구인 아우구스토 미치엘리(Augusto Michieli) 가족에게 그녀를 보냈다.
성녀 바키타는 1885년 미치엘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그 가족의 유모로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미치엘리 부부는 수단으로 영구 이주를 준비하면서 자기 딸과 유모인 성녀 바키타를 베네치아(Venezia)에 있는 카노사의 자비의 딸회(Daughters of Charity of Canossa)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잠시 맡겼다. 그곳에서 성녀 바키타는 처음으로 세상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수단에서 돌아온 미치엘리 부부가 딸과 성녀 바키타를 다시 수단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성녀 바키타는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법원까지 갔는데 성녀 바키타가 태어나기 전 영국 식민지였던 수단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했고, 이탈리아 법이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녀는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카노사의 자비의 딸회 수녀원에 남기로 한 성녀 바키타는 교리를 배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1890년 1월 9일 ‘요세피나 마르가리타’(Josephina Margarita)라는 이름으로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성년이 되어 처음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는 1893년 12월 카노사의 자비의 딸회에 입회하여 3년 뒤인 1896년 12월 8일 첫 서원을 했다. 그리고 1902년 이탈리아 북부 비첸차(Vicenza) 인근 스키오(Schio)의 수녀원으로 보내져 45년 동안 수녀원의 문지기, 요리사, 제의실 등을 담당하며 카노사의 자비의 딸회 수녀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겸손한 딸로서 살았다.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는 늘 친절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들을 대했고, 어떠한 사소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행하며 특히 가난하고 곤경에 빠진 이들을 돕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래서 비첸차 주민들은 그녀를 ‘마드레 모레타’(Madre Moretta, 검은 피부의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특별한 카리스마와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1931년 그녀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스키오 주민들은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의 기도로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고, 실제 막대한 양의 폭탄이 스키오에 떨어졌지만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녀는 1947년 2월 8일 선종하였다. 그녀가 선종하자 그녀의 덕행을 기억하는 수많은 추모객이 몰려왔고, 장례 후에 그녀의 시신은 스키오 수녀원의 성가정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의 겸손과 높은 덕행으로 인해 선종 12년 후부터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고, 1978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녀를 가경자로 선포하며 그녀의 영웅적인 덕행을 인정했다. 그녀는 1992년 5월 1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10월 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교황은 시성식 강론을 통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여성이 여전히 희생당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를 통해 소녀와 여성의 진정한 해방,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자기 권리를 찾아 인간의 존엄성을 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했다.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는 ‘고통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평가받았고,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는 2007년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1장에서 그리스도인 희망의 내용은 바로 하느님이고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희망을 얻는다는 뜻이라 하며, 그 희망의 증인으로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의 삶을 소개했다.
또한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2015년 그녀의 축일인 2월 8일을 ‘인신매매에 반대하는 세계 기도와 성찰과 행동의 날’로 제정하였다.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에 대한 아프리카 교회의 현양 열기와 사랑은 매우 특별하다.
그래서 그녀는 ‘아프리카의 꽃’으로 불리고 있고 특별히 고국인 수단의 수호 성녀로서 존경받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8일 목록에서 노예 생활의 고통에서 풀려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수도자로서 일생을 헌신한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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