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세례명 요안나는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요안나 14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요안나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요안나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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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나
천주교 여자세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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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나 여자세례명 목록
- 요안나 드 레토낙 (2월 2일)
- 요안나 (2월 4일)
- 요안나 마리아 보노모 (3월 1일)
-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 (3월 29일)
- 요안나 (3월 31일)
- 요안나 (5월 12일)
- 요안나 (5월 24일)
- 요안나 스코펠리 (7월 9일)
- 요안나 (7월 23일)
-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8월 12일)
- 요안나 들라누 (8월 17일)
- 요안나 앙티드 투레 (8월 24일)
-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 (8월 26일)
- 요안나 (11월 17일)
1. 요안나 드 레토낙
- 세례명 축일
2월 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de Lestonnac - 신분과 직업
과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6-1640년
요안나 드 레토낙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토냑,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드 레토낙 이야기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Joanna de Lestonnac)은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에서 저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인문주의 철학자였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조카이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의 분열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을 가져온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성녀 요안나의 어머니는 칼뱅주의(Calvinism)에 빠져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녀 요안나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자기 종교로 이끌고자 했던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녀 요안나는 17살에 가스통 드 몽페랑(Gaston de Montferrant)과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1597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41살에 과부가 되었고 네 아이도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나머지 네 자녀가 모두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았다. 그녀의 두 딸인 마르타(Martha)와 막달레나(Magdalena)는 보르도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원을 했고 아들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결혼을 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막내딸을 아들에게 맡기고 성녀 요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1603년 툴루즈(Toulouse)의 개혁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은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그녀는 서원을 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툴루즈 수도원에서 지냈던 마지막 밤에 성녀 요안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비추임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설립자로서의 소명과 마리아 영성에 대한 직관이었다.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려는 그녀의 계획은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즉 청소년 교육이라는 과제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리되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젊은 소녀들을 모아 라 모드(La Mothe)에 있는 자신의 땅에서 2년 동안 준비의 시간을 가졌고, 보르도에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1605년에 새로 부임한 예수회의 요한 드 보르드(Joannes de Bordes) 신부와 라이문두스(Raymundus) 신부를 비롯한 몇 명의 사제들이 영적으로 그녀의 헌신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당시 보르도에서는 특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대부분 칼뱅주의에 빠진 여교사들이 소녀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가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것처럼 가톨릭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던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맡아줄 여성 수도회의 설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요한 신부와 성녀 요안나는 이런 점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바로 수도회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1606년 3월 6일 성녀 요안나는 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보르도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적인 사도직으로 하는 여성 수도회인 마리아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160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610년 마침내 보르도에 마리아회의 첫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수도회의 사도직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때 그녀는 다른 수녀들의 음모에 휘말려 희생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모진 시련을 인내로써 극복하였다.
1640년 2월 2일 96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보르도에 묻힌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를 비롯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요안나
- 세례명 축일
2월 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 신분과 직업
왕비,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64-1505년 발루아
요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이야기
발루아의 성녀 요안나(Joanna de Valois)는 1464년 4월 23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당시의 왕인 루이 11세(Louis XI)와 왕비인 사부아(Savoie)의 샤를로트(Charlotto)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육체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고 더욱이 곱사등이에 마마 자국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왕인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매우 냉대하였다.
그러나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오를레앙(Orleans)의 공작인 루이(Louis)와 결혼하기로 정해졌기 때문에 성녀 요안나는 12세가 되던 해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정황에 따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오를레앙의 공작은 그녀를 무시하고 혐오했으나, 이러한 모진 대우들을 그녀는 고결한 성품으로 이겨냈다. 후에 루이 12세로 왕위에 오른 오를레앙의 루이 공작은 자신의 결혼은 루이 11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그의 이런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결국 혼인무효와 함께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베리(Berry)의 공작으로 봉해진 성녀 요안나는 자신의 영지를 왕국 안에서 가장 지혜롭게 운영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병자와 전염병 환자 구호, 주거 시설 복구, 가난한 일꾼들의 급여 인상, 여자 어린이들의 교육,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 모금, 수도원 개혁 등을 계획에 따라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작은 형제회 회원이자 자신의 고해사제였던 가브리엘 마리아(Gabriel Maria, 8월 27일) 신부의 도움으로 신심 깊은 10명의 여성들을 모아 관상 수도원인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1504년에 가브리엘라 마리아(Gabriella Maria)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궁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녀는 남모르는 고행과 여러 번의 신비로운 종교체험을 한 후 1505년 2월 4일 부르주(Bourges)에서 사망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1742년 4월 21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요안나 마리아 보노모
- 세례명 축일
3월 1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Mary Bonomo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606-1670년
요안나 마리아 보노모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마리아 보노모 이야기
요안나 마리아 보노모(Joanna Maria Bonomo)는 이탈리아 비첸차(Vicenza) 교구의 아지아고(Asiago) 태생으로 트렌토(Trento)의 클라라회에서 교육을 받고 1622년 바사노(Bassano)에서 베네딕토회 수녀가 되었다.
그녀는 수녀원장과 수련장 수녀 등의 직책을 역임한 후 1670년 3월 1일에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녀는 1783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
- 세례명 축일
3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Mary de Maille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414년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 이야기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Joanna Maria de Maille)의 세례명은 요안나이고 견진성사 때에 마리아란 이름을 받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고 장성한 후에는 결혼하여 남편과 오누이처럼 16년을 살았다.
그러나 남편이 전쟁 포로로 있다가 1362년에 죽음으로써 그녀는 과부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어 수덕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플랑슈-드-보의 은둔소에서 지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요안나
- 세례명 축일
3월 31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286년 툴루즈
요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이야기
가르멜회 회원인 성 시몬 스톡(Simon Stock, 5월 16일)이 프랑스 툴루즈를 지나 보르도(Bordeaux)로 가는 길에 요안나(Joanna)라는 어느 여인으로부터 자매 수녀회원이 되려는 소망을 듣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녀는 성 시몬으로부터 가르멜회 수도복을 받고 정결 서원을 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루살렘의 성 알베르토(Albertus)의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래서 그녀는 가르멜 3회의 첫 회원으로 공경을 받는다. 그녀는 매일 성당에 와서 기도하며 애덕을 실천하였다.
또 그녀는 성덕을 닦도록 어린 사람들을 지도하였고, 가르멜회에 입회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95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요안나
- 세례명 축일
5월 12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 신분과 직업
공주,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52-1490년 포르투갈
요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이야기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에서 태어난 요안나(Joanna)는 오랜 기도 끝에 알폰소 5세(Alfonso V) 왕의 딸로 태어났다. 3년 뒤 그녀의 병약한 남동생이 태어난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슬기롭고 신심 깊은 유모의 손에 맡겨졌고 어린 시절부터 참회와 기도 생활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세속의 권력이나 부를 떠나 수도생활에 헌신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와 동생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관례대로 그녀는 어려서부터 왕국의 이익을 위한 결혼을 강요당했고, 아버지와 동생이 무어인들을 상대로 전쟁에 나갔을 때는 섭정을 맡기도 했다.
가족과 왕실의 오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그녀는 마침내 1472년 전쟁에서 승리한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고 아베이로(Aveiro)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고자 했다.
그 수녀원은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그녀는 인근에 있는 왕실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로 온전히 수도생활을 할 수 없었고 왕실의 반대 또한 가라앉지 않아 정식으로 서원을 하지는 못했다. 12년 동안의 오랜 기도와 희망 끝에 그녀는 1485년에 아베이로의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적이고 참회의 생활에 전념하였고, 자신의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일들을 하며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였다.그리고 자신의 모든 수입은 가난한 이들과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요안나
- 세례명 축일
5월 24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 신분과 직업
신약인물, 예수의 제자, 부인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요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이야기
복녀 요안나(Joanna)는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Chuza)의 아내로 자기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던 여자들 가운데 하나이다(루카 8,3).
루카 복음은 또한 주간 첫날, 바로 부활절 새벽 일찍이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빈 무덤을 발견했으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로부터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열한 제자와 다른 모든 이에게 이 일을 알린 세 명의 여자 중 한 사람으로 소개하였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24,10)
그러나 다른 복음에서는 빈 무덤을 찾은 여자들 가운데 요안나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5월 24일 목록에서 루카 복음의 기록을 바탕으로 복녀 요안나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요안나 스코펠리
- 세례명 축일
7월 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Scopelli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28-1491년 레지오 에밀리아
요안나 스코펠리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스코펠리 이야기
이탈리아 북부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태어난 요안나 스코펠리(Joanna Scopelli)는 수녀가 되고 싶었으나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하자 스스로 수녀복을 입고 집에서 수녀생활을 시작하였다.
부모가 사망하자 그녀는 자유롭게 되어 모든 유산을 자선활동에 기부하고, 자신은 끊임없이 일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다.
여러모로 매우 바빴지만 그녀는 하루에 5시간이나 개인기도에 할애하고, 연중 단식재를 지키며, 성 십자가 축일부터 부활절까지는 빵과 물로만 연명하였다. 또한 그녀는 치유의 은사를 받아 의사들이 포기한 율리아 세시라는 귀부인을 완쾌시켰다. 그녀는 63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요안나
- 세례명 축일
7월 23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264-1306년 오르비에토
요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이야기
요안나(Joanna)는 이탈리아 카르나이욜라(Carnajola)의 시골 소녀로 반나(Vanna)라고 불리었다. 그녀는 5세 때에 고아가 되어 오르비에토의 어느 가정에 입양되어 자랐다.
그녀는 양부모가 결혼하라는 제의를 뿌리치고,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3회에 입회하면서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가난한 이를 위한 생활에 헌신하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수 없이 탈혼을 경험하고 또 초자연적인 일이 많이 일어났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기적을 예언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이탈을 경험하였고, 지극히 겸손하였으며, 천사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지녔다. 1306년 7월 23일 선종한 그녀에 대한 공경은 1754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 세례명 축일
8월 1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Frences de Chantal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572-1641년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가, 샹딸,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프란체스카, 후아나.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이야기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oanna Francisca de Chantal)은 1572년 1월 23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디종(Dijon)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나 18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에게 폭넓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20살 때에 크리스토프 드 샹탈(Christophe de Chantal) 남작과 결혼한 그녀는 충실한 아내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요 검소하고 알뜰한 주부로서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성(城)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관례를 만들었고, 다른 성의 신심 활동을 도입해 소개하면서 자선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둘은 유아 때 사망하였다.
게다가 1601년 남편이 사냥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녀는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시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사는 몽틀롱(Monthelon)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손자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할 수 없이 몽틀롱으로 가서 7년 동안 인내와 겸손의 덕을 실천하며 자녀교육에 힘쓰며 살았다.
1604년 사순시기 동안 친정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을 방문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제네바(Geneva)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 1월 24일) 주교의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그에게 영적 지도를 청하였다.
처음에 다소 망설이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결국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영적인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에게 순종할 것을 서약하였다.
디종의 가르멜회 수녀들과의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길 원했으나 주교는 좀 더 인내를 갖고 기다리도록 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의지에 순종하는 길과 겸손의 길로 그녀를 인도하고자 했다.
1607년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그녀에게 영성적으로는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드러났던 덕들을 따르고, 활동적으로는 노인들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헌신하는 수도 공동체를 세우려는 계획을 설명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주교의 도움으로 자녀들의 장래 문제와 집안의 대소사를 해결한 후 안시(Annecy)로 떠났는데, 그곳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새로운 수도회를 세우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1610년 6월 6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안시 수도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와 2명의 동료가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해 주교로부터 정식으로 회칙을 받았고, 이듬해에 그들 모두 수도 서원을 하고 그녀가 수녀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회의 이름과 회헌은 여러 번 바뀌다가 마침내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공식 명칭으로 확정하였다.
이 수도회는 1612년 1월부터 병자방문을 시작해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그녀는 시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후 더욱 영성적 성숙에 힘쓰며 수도회의 새로운 분원 설립에 주력하였다.
1614년 리옹(Lyon)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면서는 많은 난관을 겪기도 했다. 리옹의 대주교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계획했던 수도원의 모습과는 달리 봉쇄 수도원의 형태를 강요했고, 수도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결국 1618년 리옹 수도원은 리옹 대주교의 의도대로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인가를 받았다. 이런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급속히 확장해 나갔고 많은 여성이 입회하였다.
이러한 성공적인 확장은 육체적인 고행보다는 겸손과 온화함을 강조한 주교의 가르침과 그녀의 신중함과 헌신 덕분이었다. 1619년에 그녀는 파리(Paris) 분원을 설립하면서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 9월 27일) 신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성 빈첸시오 드 폴은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초기 정신과 활동 방향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선종한 후에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주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선종한 1622년 당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분원은 13개였는데, 프랑스 전역으로 확장하면서 그녀가 선종할 즈음에는 약 86개의 분원으로 성장하였다.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수도회 안팎으로 주어진 시련을 견디어 내면서 계속해서 분원을 설립하기 위해 거처를 옮겨 가며 생활하였다. 1627년 아들이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슬픔을 겪고, 1628년 흑사병으로 많은 수도자가 사망하자 다시 안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장상직을 역임하다가 1641년 마지막으로 파리에 가서 성 빈첸시오 드 폴을 만나고 돌아온 후 느베르(Nevers)에서 병을 얻었다.
결국 물랭(Moulins)의 분원에서 몸져누운 그녀는 1641년 12월 13일에 물랭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안시 수도원으로 옮겨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무덤 곁에 묻혔다.
그녀는 1751년 11월 21일 교황 베네딕토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라 1769년부터 로마 보편 전례력에 포함되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쓴 “신심 생활 입문”(The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에 잘 나와 있다. 그 뒤에 17세기와 19세기에 그녀의 전기가 발행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13일 목록에서 프랑스의 물랭에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설립자이자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고, 그녀의 유해가 안시로 옮겨져 첫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음을 전하며, 교황 클레멘스 14세에 의해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8월 21일에 그녀의 축일을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1969년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그녀의 축일은 선종 전날인 12월 12일로 옮겨 기념하였다. 2001년 12월 18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령에 의해 성녀 요한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의 축일은 다시 12월 12일에서 8월 12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1999년 3월 25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라틴아메리카의 수호자로 선포한 ‘과달루페(Guadalupe)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과 같은 날이어서 전례적 기념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2월 13일 목록에서 그녀의 천상 탄일을 언급하며 8월 12일로 옮겨 보편 교회에서 그녀의 축일을 경축한다고 했다.
그리고 8월 12일 목록에서 그녀가 결혼 생활을 통해 여섯 자녀를 경건하게 교육하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지도를 받아 완덕의 길을 걸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힘쓰고,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설립해 헌신하다가 프랑스 물랭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요안나 들라누
- 세례명 축일
8월 17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eanne Delanoue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666-1736년
요안나 들라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들라누 이야기
성녀 요안나 들라누(Joanna Delanoue)는 1666년 6월 18일 프랑스 앙주(Anjou) 지방 사뮈르(Samur)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종교용품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열두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169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어머니의 사업을 이어받아 현명하고 성실하게 운영해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1698년 성령 강림 대축일 주간에 그녀는 인간의 삶과 일의 가치에 대한 두 개의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하나는 환시 체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렌(Rennes)에서 순례를 떠난 과부 프란체스카 수쉐(Francesca Souchet)의 신심 깊은 권고의 말이었다.
이 두 사건은 그녀의 사고방식을 바꿔 자신의 안위에만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보다 영적인 수준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잘 나가던 상점 문을 닫고 세상의 안락함과 성공이 아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별히 사뮈르 지역의 고아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마침 그녀의 선행에 감동한 사람들이 세 채의 집을 기증하자 이를 가난한 고아들의 안식처로 만들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자선활동에 동참하면서 작은 모임이 형성되자 그녀는 1704년 ‘사뮈르의 하느님 섭리의 성녀 안나 수녀회’(Sisters of St. Anne Providence of Samur)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수도명을 ‘십자가의 요안나’(Jeanne of the Cross)로 정하였다.
성녀 요안나 들라누는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1721년 무렵에는 그녀와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가 이미 프랑스 전역에 많은 고아원과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고행과 기도 속에 늘 헌신적으로 자선활동을 벌이던 그녀는 1736년 8월 17일 프랑스의 팡세(Fencet)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947년 11월 8일 교황 비오 12(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요안나 앙티드 투레
- 세례명 축일
8월 2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Antide Thouret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5-1826년
요안나 앙티드 투레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앙티드 투레 이야기
프랑스 상시-러-롱에서 1765년 11월 27일에 태어난 성녀 요안나 앙티드 투레(Joanna-Antide Thouret)는 제혁업자의 딸로 그녀의 나이 16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가사를 전담하다가, 1787년에 파리(Paris)의 성 빈첸시오 애덕 자매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1793년 혁명 정부가 프랑스의 수도회를 해체시켰을 때, 그녀는 그때까지 서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시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여기서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고,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한편 혁명으로 피해 다니는 사제들을 숨겨주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녀는 1796년 스위스로 도망가야 했다.
그 후 그녀는 브장송(Besancon)에서 학교를 개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4명의 자매들과 함께 1799년에 학교를 세웠다. 그녀의 공동체가 급성장하자 앙티드는 벨러브에 불우여성 수용소를 세웠다.
1807년 그녀의 회칙이 브장송의 러 코즈 대주교로부터 승인받자 이 단체는 스위스, 사부아(Savoie), 나폴리(Napoli) 등지로 확산되었다.
1818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는 이 단체를 성 빈첸시오 드 폴의 보호 아래 있는 애덕의 딸 수녀회란 이름으로 승인하였다. 만년에 그녀는 이탈리아에 수녀회를 세우는데 전념하다가 1826년 8월 24일 운명하였고, 1934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
- 세례명 축일
8월 2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Elizabeth Bichier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3-1838년 아제스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쉬에르,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요한나,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 이야기
프랑스 부르주(Bourges) 근방 러 블랑의 샤토 데 아제스에서 그 지방의 영주인 안토니 비쉬엘의 딸로 태어난 성녀 요안나 엘리사벳 비쉬엘(Joanna Elisabeth Bichier)은 조안 엘리사벳 마리 루시(Jeanne Elizabeth Marie Lucy)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항상 엘리사벳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푸아티에(Poitiers) 근방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녀의 부친은 의회의 몰수령으로부터 가족의 재산을 성공적으로 방비한 뒤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1796년 모친과 함께 푸아티에 근교인 베티네스로 이사한 후부터 혁명 정부의 사제들과 무신론자들을 배격하면서 시골에서 홀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797년 그녀는 성 안드레아 후베르투스 푸르네(Andreas Hubertus Fournet, 5월 13일) 신부를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성 안드레아 푸르네 신부는 그녀에게 교육에 종사하면서 병자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수도회 설립에 따른 규칙을 만들어 주었다.
1804년 그녀의 모친이 운명하자 그녀는 푸아티에의 카르멜회 수녀원의 수련자가 되었으나, 섭리회로 가서 성 안드레아 푸르네 신부가 계획하는 수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성녀 요안나 엘리사벳은 어린이를 가르치고 병자와 노인들을 돌보는 공동체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단체는 1807년에 첫 서원식을 거행하였고, 1816년에 푸아티에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811년과 1830년 사이에 60개 이상의 수도원이 생겼다. 이 수녀회는 보통 성 안드레아 사도 수녀회로 불렸으나 공식적인 명칭은 십자가의 딸 수녀회이다.
성녀 요안나 엘리사벳은 점잖고 온순한 여성으로 많은 여행으로 경험을 얻었고, 또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극히 단순한 여성으로 비쳤다.
그녀가 1834년에 임종할 때 바스크(Basque) 사제인 성 미카엘 가리코이트(Michael Garicoits, 5월 14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성 미카엘이 ‘베타람의 성심 사제회’라 부르는 선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요안나
- 세례명 축일
11월 17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307년 세냐
요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이야기
요안나(Joanna)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교외 세냐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매우 가난한 농부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양치는 일로 부모를 도왔다. 그러나 매우 열심하던 그녀는 양치는 다른 친구들을 권유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보살폈고, 또한 자신이 먼저 모범적으로 살았다.
23세 때에 그녀는 성녀 베르디아나(Verdiana)의 섭리적인 말씀으로 영감을 받고, 고향 마을의 강둑에 움막을 짓고 은수생활을 시작하여 40년을 살았다. 이때부터 그녀 주변에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798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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