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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 남자세례명 7인 목록

피어나네 2025. 4. 1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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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마티아는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마티아 7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마티아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마티아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남자 세례명 찾기

마티아
천주교 남자세례명
7인 목록

 

 

 

 

마티아 남자세례명 목록

 

  1. 마티아 (1월 30일)

  2. 마티아 (2월 6일)

  3. 마티아 (5월 14일)

  4. 박상근 마티아 (5월 29일)

  5. 최여겸 마티아 (5월 29일)

  6. 최인길 마티아 (5월 29일)

  7. 마티아 물룸바 (5월 30일)

 

마티아 천주교 남자세례명 7인 목록

 

 

1. 마티아

 

  • 세례명 축일
    1월 3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ias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예루살렘(Jerusalem)

 

 

마티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마티아 이야기

성 마티아스(또는 마티아)는 2세기에 활동한 예루살렘의 여덟 번째 주교로 알려졌다. 그는 로마제국의 점령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봉기로 인해 혼란스러운 격동기에 예루살렘 교구의 주교로서 몇 년간 사목했다.

교회사가인 카이사레아(Caesarea)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서 그가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며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120년경 평화롭게 선종했다고 적었다.

그 외에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지만, 옛 “로마 순교록”은 855년경 비엔(Vienne)의 성 아도(Ado, 12월 16일) 주교가 쓴 “아도 순교록”(Martyrologium Adonis)의 내용을 받아들여 1월 30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전해주었다.

즉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마티아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많은 시련을 견뎌낸 후 평화롭게 선종했다고 적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고통을 겪은 후 평화롭게 선종한 성 마티아 주교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티아

 

  • 세례명 축일
    2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ia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597년 일본(Japan)

 

 

마티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마티아 이야기

성 마티아스(또는 마티아)는 일본 태생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었다.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예수회의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방문하고, 1593년 에스파냐 출신의 작은 형제회 신부로 당시 필리핀의 마닐라(Manila)에서 활동하던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가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의 대사 자격으로 일본에 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면서 금교의 제약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596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금교 조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 일대에서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세우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그해 여름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가 태풍에 밀려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며 일본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 결과 1596년 말부터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과 함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이들은 작은 형제회의 신부와 수사 6명, 작은 형제회의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 예수회의 수사 3명 등 모두 24명이었다.

박해 중에 군인들이 미야코로 그리스도교 신자를 체포하러 왔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마티아를 찾고 있었다. 그러자 흔히 미야코의 성 마티아(Matthias of Miyako)로 불리는 성 마티아가 자기가 바로 그들이 찾는 마티아라고 하여 다른 마티아 형제를 구하고 대신 체포되었다.

1597년 1월 3일, 미야코 감옥에 갇혔던 성 마티아와 동료들은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長崎, Nagasaki)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성 마티아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성 마티아와 25명의 동료는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 마티아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티아

 

  • 세례명 축일
    5월 1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ias

  • 신분과 직업
    사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마티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마티아 이야기

성 마티아스(또는 마티아)는 열두 사도 중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의 배반과 죽음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사도들은 성 요한(Joannes, 6월 24일)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서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고자 했다. 그래서 후보자로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Josephus)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 다음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사도 1,15-26).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한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마티아스’(Mattias)와 히브리어 ‘마티티아’(Mattithiah)에서 유래했는데,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성 마티아는 주님의 선물로서 열두 사도단의 일원이 된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서 열두 사도로 선출된 사실 이외에 성 마티아에 관한 언급이 더는 나오지 않는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한 72명의 제자(루카 10,1-12)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 외에도 자캐오(Zachaeus)나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와 동일 인물이라는 전승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성 마티아에 대한 전승은 모호하고 불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순교 방식에 대해서도 십자가형 또는 참수형을 받았다는 두 가지 전승이 주로 전해지고 있다.

전승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는 사도가 된 후 오랫동안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 지역으로 갔는데, 남쪽으로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내륙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하고, 다른 전승은 북쪽으로 흑해 연안의 콜키스(Colchis, 오늘날의 조지아 일대)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Jerusalem)에서 유다인에게 돌에 맞은 후 도끼 또는 미늘창(도끼와 창을 합친 무기)으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그를 표현할 때 십자가를 들거나 도끼 또는 미늘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사도 성 마티아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도로 뽑혔으며,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또 축일도 2월 24일에 기념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과 함께 이듬해부터 매년 5월 14일, 주님 승천 대축일과 가까운 부활 시기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8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4일 목록에서 이전 판과 같은 내용을 전하며 ‘유다 지방에서’라는 말을 빼고 그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처럼 로마 순교록은 그의 순교 방법이나 장소 그리고 무덤 등에 대해서는 전승의 다양함을 인정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사도 성 마티아의 유해는 나중에 성녀 헬레나(Helena, 8월 18일) 황후에 의해 발굴되어 로마로 이장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다시 독일 남서부의 트리어(Trier)로 옮겨 모셨다.

나중에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분실되었다가 발견되어 다시 안장되었고, 현재 그의 지하 무덤 위에는 베네딕토회의 성 마티아스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성 마티아는 오늘날까지도 트리어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기술자의 주보 성인이자 목수와 재단사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박상근 마티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ias

  • 신분과 직업
    중인, 아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7-1867년 한국(Korea)

 

 

박상근 마티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박 마티아, 박마티아.

 

 

박상근 마티아 이야기

박상근 마티아(Matthias)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박 마티아는 평소에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주곤 하였다. 이후 그는, 칼래(N. Calais, 姜)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그해 3월 중순경에 좁쌀을 사려고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에 갔다가 칼래 신부를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와서 숨겨 주었다.

3일 뒤 박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으려고 다시 한실로 갔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면서 박 마티아에게 집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되돌아와 있던 박 마티아는, 얼마 뒤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를 봉행한다.”고 명백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박 마티아는 형벌을 받고 옥으로 돌아오면 함께 있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그러한 모습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렀다. 박상근 마티아는 마침내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하기 직전에 박상근 마티아는 성호를 긋고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순교한 다음,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가 고향에 안장하였다.

박상근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최여겸 마티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汝謙 Matthias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3-1801년 한국(Korea)

 

 

최여겸 마티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최 마티아, 최마티아.

 

 

최여겸 마티아 이야기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 마티아(崔汝謙, Matthias)는, 일찍이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Paulus)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혼인한 뒤에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를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당시 그의 처가는 충청도 한산에 있었는데, 그가 이 루도비코 곤자가를 만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후, 무장으로 돌아온 최 마티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 데 힘써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 마티아는 일단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최 마티아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일단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최 마티아가 무장 관아에 이르자, 관장은 곧장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문초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도 최 마티아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렬한 신자인 한정흠 스타니슬라오(韓正欽, Stanislaus)와 김천애 안드레아(金千愛, Andreas)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최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마티아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곳 개갑 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형조에서 최여겸 마티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최여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최인길 마티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崔仁吉 Matthias

  • 신분과 직업
    역관, 밀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5-1795년 한국(Korea)

 

 

최인길 마티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최 마티아, 최마티아.

 

 

최인길 마티아 이야기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Paulus)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尹有五, Jacobus)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尹占惠, Agatha)와 윤운혜 루치아(尹雲惠, Lucia)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 사바(池璜, Sabas)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 마티아(崔仁吉, Matthias)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崔仁喆, Ignatius)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Columba)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마티아 물룸바

 

  • 세례명 축일
    5월 3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ias Mulumb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6?-1886년 우간다(Uganda)

 

 

마티아 물룸바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깔렘바,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무룸바, 므룸바, 칼렘바.

 

 

마티아 물룸바 이야기

성 가롤로 르왕가(Carolus Lwanga)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역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왕(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가롤로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왕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 왕은 자기 나라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와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왕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고, 성 가롤로 르왕가는 그날 밤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왕의 비윤리적이고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왕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까지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가롤로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이날 성 가롤로 르왕가와 함께 순교한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들로 주로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이거나 왕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음바가 투진데(Mbaga Tuzinde), 성 브루노 세룬쿠우마(Bruno Sserunkuuma), 성 야고보 부자발야보(Jacobus Buuzabalyawo), 성 키지토(Kizito), 성 암브로시오 키부우카(Ambrosius Kibuuka), 성 무가가 루보와(Mugagga Lubowa), 성 갸비라 무소케(Gyavira Musoke), 성 아킬레오 키와누카(Achilleus Kewanuka), 성 아돌포 무카사 루디고(Adolphus Mukasa Ludigo), 성 무카사 키리와완부(Mukasa Kiriwawanvu), 성 아나톨리오 키리그과조(Anatolius Kiriggwajjo), 성 루카 바아나바킨투(Lucas Baanabakintu)이다.

이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이미 여러 곳에서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25일에 무뇨뇨(Munyonyo)에서 무왕가 왕의 시종이었던 16세의 성 디오니시오 세부그와워 와스와(Dionysius Ssebuggwawo Wasswa)가 칼과 창에 찔려 순교했고,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무테사와 무왕가 왕 모두를 섬기며 악단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했던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참수되고 난도질당해 순교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이교도와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데 헌신했었다. 같은 날 성 폰시아노 응곤드웨(Pontianus Ngondwe)는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가는 도중 창에 찔려 순교한 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졌다. 27일에는 왕실 금고와 장신구 등을 담당했던 성 아타나시오 바제쿠케타(Athanasius Bazzekuketta)가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에 나키부보(Nakivubo)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곤자가 곤자(Gonzaga Gonza)도 쇠사슬에 묶여 처형장인 나무공고로 끌려가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30일에는 마티아 칼렘바 물룸바(Matthias Kalemba Mul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스 물룸바(또는 마티아 물룸바)가 우간다 왕국의 수도인 캄팔라(Kampala)에서 27일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베인 채 가장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왕의 시종으로 아직 소년이었던 성 노아 마와갈리(Noah Mawaggali)가 나무공고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끝으로 이듬해인 1887년 1월 27일에는 질병과 전통 의학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세례를 받은 성 요한 마리아 무제이(Joannes Maria Muzeeyi)가 멩고(Mengo) 근처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왕의 부당한 요구와 비윤리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가롤로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우간다의 순교자들은 성인품에 오른 22명의 가톨릭 신자 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이 있었다.

성 가롤로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3일에 순교한 성 가롤로 르왕가와 12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그날 함께 기념하고, 나머지 9명의 순교자들은 각자 순교한 날에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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