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세례명 막시미아노는 막시미아누스, 막시미안, 막씨미아노, 막씨미아누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막시미아노 6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막시미아노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막시미아노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남자 세례명 찾기
막시미아노
천주교 남자세례명
6인 목록
막시미아노 남자세례명 목록
1. 막시미아노
- 세례명 축일
1월 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an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0년경 보베(Beauvais)
막시미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미아누스, 막시미안, 막씨미아노, 막씨미아누스.
막시미아노 이야기
성 루치아노(Lucianus)는 3세기에 갈리아 지방 선교를 위해 로마(Roma)에서 파견된 사제로 주로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지역에 있는 보베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함께 온 동료인 성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또는 막시미아노)와 성 율리아노(Julianus)와 더불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중세에 성 루치아노에 대한 수난기가 등장하면서 그를 보베의 초대 주교이자 순교자로서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에 의해 개종한 후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어 갈리아 지방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다는 전승이 생겼다.
그에 따르면 성 막시미아노는 신부였고, 성 율리아노는 부제였다. 하지만 이는 보베 교구의 사도적 기원을 주장하기 위해 사도 시대와 직접 연결하려 했던 중세 시대의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 성 루치아노의 실제 순교 시기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 치하인 290년경으로 보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8일 목록에서 프랑스의 보베에서 성 루치아노 신부와 성 막시미아노와 성 율리아노가 순교했는데, 뒤의 두 사람은 박해자의 칼에 맞아 죽었으나 파리(Paris)의 성 디오니시오(Dionysius, 10월 9일)와 함께 프랑스에 온 성 루치아노는 동료들이 순교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결국은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90년경 프랑스의 보베에서 성 루치아노와 성 막시미아노와 성 율리아노의 순교가 있었다는 사실만 간단히 기록하였다. 그들의 신분에 대해서도 순교자라는 칭호 외에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막시미아노
- 세례명 축일
2월 2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an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56년 라벤나(Ravenna)
막시미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미아누스, 막시미안, 막씨미아노, 막씨미아누스.
막시미아노 이야기
성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또는 막시미아노)는 499년경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이스트라반도(Istria Peninsula) 최남단에 있는 풀라(Pula)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 지역 교회의 부제가 되었는데, 그 스스로든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든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덕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545년에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의 주교가 선종하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교황 비질리오(Vigilius)에게 라벤나 주민들이 추천한 후보 대신 성 막시미아노를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성 막시미아노는 546년 라벤나의 주교로 임명되어 교황 비질리오에 의해 주교로 축성되었고, 팔리움을 받으며 대주교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라벤나 주민들은 자신들이 추천한 후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라벤나 성벽 밖에서 한동안 지내며 신중하고 관대한 태도로 슬기롭게 반대를 극복하고 주민들의 인정을 얻어냈다.
성 막시미아노는 라벤나의 대주교로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내인 테오도라 황후의 도움으로 라벤나에 산 비탈레 대성당(Basilica di San Vitale)과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대성당(Basilica di Sant’Apollinare in Classe)을 완공하여 봉헌하였다. 그는 또한 고향에 있는 성당과 다른 많은 성당을 건설하거나 모자이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는 성당 건축뿐만 아니라 전례서의 개정과 성경 라틴어 본문의 교정 그리고 많은 사본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라벤나 대성당의 제단 위에 매우 귀한 천을 걸고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수로 놓아 봉헌했고, 또 다른 천에는 모든 전임 주교들의 초상화를 수를 놓아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걸었다.
이렇듯 그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9세기에 라벤나의 역사가인 안드레아 아녤로(Andrea Agnello) 신부가 로마의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를 모델로 해서 쓴 “라벤나 주교 연대기”(Liber pontificalis ecclesiae ravennatis) 덕분이었다.
아녤로 신부는 성 막시미아노 주교를 “낯선 사람을 환영하고, 오류에 빠진 사람을 불러 모으고,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목자로 묘사하였다. 그는 556년 2월 21일 또는 22일 라벤나에서 선종하여 그가 지은 라벤나의 산탄드레아 마조레(Sant’Andrea Maggiore) 성당에 묻혔다.
1809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라벤나를 점령하고 성당이 폐쇄되자 그의 유해를 산 비탈레 대성당으로 옮겨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2월 21일 목록에서 라벤나의 주교인 성 막시미아노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22일로 축일을 옮겨 라벤나의 주교인 성 막시미아노가 사목자로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이단에 맞서 교회 일치를 수호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막시미아노
- 세례명 축일
6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an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94년 시라쿠사(Siracusa)
막시미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미아누스, 막시미안, 막씨미아노, 막씨미아누스.
막시미아노 이야기
성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또는 막시미아노)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대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지도하에 로마(Roma)에 있는 성 안드레아(Andreas)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교황 펠라기우스(Pelagius)와 대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동로마 황제에게 파견된 교황사절로서 활동하였다.
교황 대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다시 로마로 소환하여 함께 일하다가 591년에 그를 시라쿠사의 주교이자 시칠리아의 교황사절로 임명하였다. 그는 시라쿠사에서 사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막시미아노
- 세례명 축일
7월 2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an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0-362년경 에페수스(Ephesus)
막시미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미아누스, 막시미안, 막씨미아노, 막씨미아누스.
막시미아노 이야기
소아시아 지방 서해안 도시인 ‘에페수스의 7인의 잠든 자’로 불리는 성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또는 막시미아노), 성 말코(Malchus), 성 마르티니아노(Martinianus), 성 디오니시오(Dionysius), 성 요한(Joannes), 성 세라피온(Serapion), 성 콘스탄티노(Constantinus)의 이름은 전설의 여러 전승에 따라 다르게도 나타나지만, 그들은 데키우스 황제(Decius, 249~251 재위)의 통치 때 동굴에 감금당했으나 거의 200년 후에 살아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깨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며 곧 성인으로 공경받기 시작했다. 장시간의 수면은 신화와 민담의 공통된 주제로 그리스도교적 색채를 머금고 있는 이 이야기는 이미 6세기에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500년경에 시인이자 신학자인 사루(Sarugh)의 야고보(Jacobus)가 시리아어로 남긴 기록이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도미니코회 회원이자 제노바(Genova)의 대주교인 복자 야고보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 7월 13일)가 “황금 전설”(Legenda Aurea, Golden Legend) 안에 그들의 이야기를 포함한 후 대중적 인기가 많아졌다.
7인의 잠든 자들은 에페수스에서 태어났다. 데키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처형하러 에페수스에 와서 도시 중앙에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자신과 함께 우상에게 희생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찾아내어 희생 제사를 올리든지 아니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경험하든지 선택을 하게 했다.
그 일로 인해 고통이 너무나 두려웠던 나머지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밀고하고, 아버지가 아들과 인연을 끊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루카 12,53)라는 말씀처럼.
7인의 잠든 자로 불리는 7명의 그리스도인도 이때 체포되었다. 그들은 우상 앞에서 희생제물 바치기를 거부하는 데 앞장선 인물들로 자신들의 집에 숨어 단식하며 기도하던 이들이었기에 많은 군중이 그들의 체포에 대해 매우 슬퍼하였다. 데키우스 황제에게 고발당한 후 그들은 신심이 매우 깊은 신앙인임이 드러났다.
그들에게는 황제 앞에 재출두하기 전까지 배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와중에 자신들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고, 모여서 회의한 후 첼리온 산(Mount Celion)에 올라가 비밀리에 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를 돌보고 봉사하며, 도시로 내려올 때면 걸인 복장을 하고 내려오곤 했다.
데키우스 황제가 돌아와 그들을 소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들을 섬기며 식사와 음료를 대접하던 성 말코는 몹시 무서워하며 돌아와 황제의 광포함과 광기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모두 하느님의 뜻대로 깊은 잠에 빠졌고,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그들을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데키우스 황제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그들이 살던 동굴의 입구를 돌로 막아 봉인하여 그들을 굶겨 죽이기로 했다. 지방 장관과 두 명의 신자인 테오도루스(Theodorus)와 루피누스(Rufinus)는 그들의 순교록을 써서 돌 사이에 끼워 놓았다.
데키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Theodosius II, 402~450년 재위) 재위 30년에 자비로우시며 죽은 이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들은 다시 깨어나게 되었다. 한 에페수스의 시민이 버려지고 별 쓸모없는 산에 목동을 위해 마구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마구간을 만들던 한 벽돌공이 우연히 동굴을 열게 되었고, 그 순간 그들은 잠에서 깨어 서로 인사를 하며 전날의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겨우 하룻밤 지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성 막시미아노는 그들의 종이었던 성 말코에게 시내에 가서 빵을 사 오라고 하며 전날 사 왔던 양보다 조금 더 사 오라고 했다.
그리고 황제의 명령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성 말코는 5실링을 가지고 동굴을 나와 동굴 앞에 있던 벽돌공들을 보고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성 말코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서 동굴 앞에 있던 돌무더기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품지 못했다.
도시까지 오면서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그는 성문에 도착한 순간 완전히 아연실색했다. 성문 위에 버젓이 세워진 십자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다른 성문으로 가보았지만, 그곳에도 십자가가 달려 있었고, 모든 성문마다 십자가가 달려 있고 도시 전체가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는 잠시 자신을 진정시킨 뒤 얼굴을 숨기고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빵 가게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들은 그는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어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더니 어떻게 오늘은 모든 이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이 도시는 다르게 지어진 에페수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참으로 에페수스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성 말코는 동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돈을 내고 빵을 샀다. 그런데 오래된 동전에 놀란 상인은 빵을 사러 온 젊은이가 보물을 발견했다고 외쳤다. 그리고 옛 황제들의 보물을 보여주면 빵과 돈을 주겠다고 말하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상인은 친구가 되어 비밀을 지키겠다며 그를 보챘다. 성 말코는 너무나 놀라 공포에 질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말을 하지 않자 상인과 주변에서 몰려온 이들이 그의 목을 끈으로 묶어 도시 가운데로 끌고 갔다. 그 도시의 마르티누스(Martinus) 주교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정관인 안티파테르는 이 소식을 듣고 성 말코와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성당으로 소환된 성 말코는 자신이 데키우스 황제에게 넘겨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교와 집정관은 돈을 보고 놀라 알려지지 않은 이 보물을 어디서 발견했는지 물었다. 성 말코는 그 돈은 어디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과 재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정관은 그 돈이 데키우스 황제 통치 초기의 것으로 현재 통용되는 것과 전혀 다르다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성 말코는 무척 당혹해하며 자신과 동료들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부터 도망쳐 있으며, 만약 이 도시가 에페수스가 맞는다면 어제 황제가 에페수스로 들어왔다고 대답했다.
주교는 한참을 생각한 후 주님께서 이 젊은이를 통해 무엇인가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성 말코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첼리온 산에 있는 나의 동료들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리고 믿으십시오. 우리는 모두 데키우스 황제의 면전에서 도망쳐왔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성 말코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고 도시의 많은 군중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성 말코가 동굴에 먼저 들어가고 주교가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동굴을 막았던 돌들 사이에서 은으로 봉인된 두 개의 편지를 발견했다. 주교는 함께 온 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모든 이들이 놀라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동굴 안에 앉아있는 성인들을 보았다. 그들의 용모는 꽃피는 장미 같았으며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었다. 성 막시미아노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설명하며 부활을 굳게 믿는다면 영원히 살 것이라 하고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맡겨드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날 밤 성인들은 황제의 꿈에 나타나 그들이 부활할 그 날까지 누워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황제는 동굴을 진귀한 돌로 아름답게 꾸미고 귀한 보물로 그들의 무덤을 장식하였다.
이 이야기는 몇몇 잊힌 묘소를 발굴하던 중 “주님 안에서 잔다”라는 용어를 오해한 데서 나온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육신의 부활에 대한 논쟁과 연관되어 기록된 신심 깊은 가공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영웅들은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특히 동방 교회에서 이 성인들은 매우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들이 발견되었던 동굴은 순례자들에게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큰 석관에 담겨 프랑스의 마르세유(Marseille)로 옮겨져 성 빅토르(Victor) 성당에 안장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16세기에 교회사학자로 유명한 카이사르 바로니우스(Caesar Baronius, 1538~1607년) 추기경은 이 이야기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들의 이름과 축일은 옛 “로마 순교록”의 7월 27일 목록에 의해 보존되었다.
그러나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의 이름은 삭제하고 ‘에페수스의 7인의 거룩한 잠든 이들’이 순교한 후 평화로운 쉼 속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들은 보통 동굴에서 잠들어 있는 일곱 명의 젊은이들로 묘사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막시미아노
- 세례명 축일
8월 2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an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3년
막시미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미아누스, 막시미안, 막씨미아노, 막씨미아누스.
막시미아노 이야기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군대의 상징으로 두라고 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명(첫 글자만 짜 맞춘 글자)을 뜯어내고, 이방인의 신들을 조각한 상징물을 달라고 명하였을 때,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열렬한 신자이던 성 보노수스(Bonos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또는 막시미아노)는 이를 거부하였다.
황제의 사촌인 율리아누스 백작이 이를 보고 괘씸히 여겨 그들에게 로마신의 공경을 강요하며 고문하였다. 이때 보노수스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이따위 신들에게 예배드릴 순 없다”고 용감히 맞섰기 때문에, 같은 태도를 취하였던 동료 장교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막시미아노
- 세례명 축일
10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an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04년 바가이(Bagae)
막시미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미아누스, 막시미안, 막씨미아노, 막씨미아누스.
막시미아노 이야기
성 막시미아누스(또는 막시미아노)는 누미디아(Numidia,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지방 바가이의 주교이다. 그는 도나투스파(Donatism) 이단이 한창 아프리카에 혼란을 일으킬 때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성 막시미아누스는 그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반발하고 도나투스파 이단의 결정적인 적개심에서 기인한 밀레비스(Milevis) 공의회에서 그의 사의가 승인되자 주교좌에서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이단들은 그를 탑 위에서 집어 던졌다. 간신히 이단들의 공격에서 살아난 성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로 갔고 그곳에서 호노리우스 황제로부터 그의 노고를 인정받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
이름순 가톨릭 세례명
본받고 싶은 가톨릭 성인 찾기
pieonane.com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날짜순 천주교 세례명
어떤 세례명이 좋을까?
pieona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