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세례명 아녜스는 아그네스, 아네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아녜스 5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아녜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아녜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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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천주교 여자세례명
5인 목록
아녜스 여자세례명 목록
1. 아녜스
- 세례명 축일
1월 21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gnes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로마
아녜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그네스, 아네스.
아녜스 이야기
성녀 아녜스는 로마의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성인 중 한 명이다. 로마의 어느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그녀는 평소 늘 순결한 생활을 희구하며 하느님께 동정을 바칠 결심을 했다.
그녀가 소녀티를 벗자마자 많은 젊은이가 그녀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성녀 아녜스는 집을 떠나 순교할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어느 청혼자의 고발로 신자임이 드러나 총독 앞으로 끌려갔다. 불과 만 13세에 지나지 않았던 성녀 아녜스는 온갖 고문 기구를 늘어놓고 위협하는 총독의 심문에 직접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자 격노한 총독은 그녀를 로마의 한 매음굴로 보냈다. 하지만 성녀 아녜스는 영웅적인 용덕(勇德)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정결을 성공적으로 지킬 수 있었다. 다시 총독 앞으로 불려간 성녀 아녜스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녀 아녜스에 대해 전해오는 많은 전설 가운데에는 신빙성이 없는 것들도 있지만, 그녀가 어린 나이에 순교자로서 처참하게 죽었으며, 로마의 노멘타나 가도(Via Nomentana) 근처 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성녀 아녜스는 순결과 순수함을 추구하는 동정녀(소녀)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그녀의 순결과 순교를 표현하기 위해 '어린 양'(Agnus 아뉴스; Agnes 아녜스)과 함께 종려 나뭇가지를 든 모습을 주로 사용했다.
성녀 아녜스는 고대부터 로마 미사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로마 전문)에서 기억하는 7명의 성녀 중 한 명으로 공경을 받아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아녜스
- 세례명 축일
3월 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gnes - 신분과 직업
공주,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211-1282년 보헤미아
아녜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그네스, 아네스.
아녜스 이야기
성녀 아녜스는 성 벤체슬라우스(Wenceslaus, 9월 28일) 왕의 후손으로 1197년에 보헤미아의 왕좌에 오른 오토카르 1세(Ottokar I)와 헝가리 왕국의 공주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났다.
1211년 프라하(Prague)에서 태어난 그녀는 또한 헝가리의 성녀 엘레사벳(Elisabeth, 11월 17일)과는 사촌 간이다. 성녀 아녜스는 당시 관습대로 불과 세 살 때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 하인리히(Heinrich)의 아들인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약혼하고, 약혼자의 어머니가 트레브니츠(Trebnitz)에 세운 시토회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6살 때 약혼자가 죽음으로써 보헤미아로 돌아왔고, 8살 때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2세(Frederick II)의 아들인 하인리히와 약혼하여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독일어와 그곳의 풍습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수도 성소에 대해 생각을 조금씩 키워온 성녀 아녜스는 늘 하느님께 굳은 신앙을 표현하고자 애썼으며, 자기 혼자서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며 덕을 닦았다. 그녀는 차츰 나이가 들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동정 생활을 갈구하게 되었고 꼭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였다.
마침 하인리히 왕자가 정치적 이유로 오스트리아 공작의 딸과 결혼하면서 기회가 오는 듯했으나 오히려 평소 그녀를 눈여겨본 프레데릭 2세 황제의 청혼을 받게 되었다.
부모와 나라를 위한 결혼과 수도 성소 사이에서 고민하던 성녀 아녜스는 완강히 황제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게 탄원하여 황제와의 약혼을 무효로 했다.
황제 또한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아니라 천상 임금님께 간다는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 파혼을 받아들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더욱 열렬히 기도하고 고행을 실천하며 화려한 궁중 의상 밑에 고행복을 입고 지냈다.
그녀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맨발로 성당을 다녀오기 일쑤였다. 성녀 아녜스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과 같이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응답할 준비를 했다.
1225년 작은 형제회 수사들이 프라하에 도착해 수도회의 정신을 소개하자 성녀 아녜스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수도 정신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녀는 오빠에게 하사받은 토지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병원을 지어 작은 형제회에서 운영하도록 했고, 1234년에는 프라하에 클라라회의 수도원(후에 성녀 아녜스 수녀원으로 불림)을 세우고, 클라라회의 정신과 규칙대로 올바로 운영될 수 있도록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1236년 봉쇄 수녀원인 클라라회에 입회하였다. 성녀 아녜스는 공주 출신이었지만 수녀원에 딸린 병원에서 나병 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볼 뿐만 아니라 수녀원의 하찮은 일까지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았다.
모범적 수도자로 연륜을 쌓은 그녀는 후에 수녀원의 원장으로서도 최선을 다하다가 1282년 3월 2일(또는 6일) 선종하였다.
서로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20여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던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는 보헤미아 혹은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로 불리는 그녀를 ‘나의 반쪽’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1874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11월 1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의 축일은 선종일인 3월 2일 또는 6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아녜스
- 세례명 축일
4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gnes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268-1317년 몬테풀치아노
아녜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그네스, 아네스.
아녜스 이야기
성녀 아녜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지방 그라치아노 베치오(Gracchiano-Vecchio)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는 6살 때부터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부모에게 졸라 9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 근처에 있는 몬테풀치아노의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4년 뒤 성녀 아녜스는 교황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로부터 프로체나(Procena)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는 것을 도우라는 사명을 받았다. 성녀 아녜스는 그곳에서 놀라운 성덕으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었고, 결국 15세의 나이로 최연소 원장이 되었다.
1300년경 몬테풀치아노 사람들이 새로운 수도원을 건립하기 위해 그녀가 돌아오기를 청했다. 몬테풀치아노로 돌아온 성녀 아녜스는 성 도미니쿠스(Dominicus)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수녀원을 세워 1317년 그곳에서 선종하여 묻힐 때까지 원장의 책임을 다했다.
그녀는 놀라운 금욕생활을 실천했고, 수많은 환시와 기적 그리고 다른 놀라운 일들도 많이 일으켰다. 그녀의 기적 중에서 유명한 것은 빵의 기적이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셨듯이, 성녀 아녜스는 빵 한 덩이로 가난한 수녀원의 모든 이들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또 엄격한 금식으로 고행을 실천하다가 영성체를 잊은 날이 있었는데, 깊은 슬픔에 빠진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성체를 모시도록 해주셨다.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던 성녀 아녜스는 1316년부터 급속히 나빠져 의사의 권유로 온천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수녀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0일 선종해 수녀원 성당에 안치되었고, 이후 그곳은 많은 이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아녜스는 도미니코회 수녀원장으로서 어린 양, 백합, 책 등과 함께 묘사된다. 성녀 아녜스는 1608년 복자품에 올랐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김효주 아녜스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孝珠 Agnes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1839년 한국
김효주 아녜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아녜스, 김아녜스, 아그네스, 아네스, 아녜스.
김효주 아녜스 이야기
성녀 김효주 아녜스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마을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어머니는 6남매의 자녀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한 신자생활을 하였다.
아녜스는 성교회에 입교한지 오래지 않아 벌써 탁월한 모범을 보이더니, 언니 콜룸바(Columba)와 동생 클라라와 함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고 아름다운 덕을 쌓았다. 이들 자매는 모친을 잃은 뒤에는 서울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용머리 마을의 오빠 집에서 살고 있었다.
기해년(1839년) 5월 3일 포졸들이 서울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김 안토니우스(Antonius)의 집을 포위했으나, 그들이 올 것을 눈치 챈 안토니우스는 가족을 데리고 피신한 후였고, 그의 집에는 효주 아녜스와 효임 콜룸바 그리고 세 살 된 어린아이만 남아 있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포장은 효주 아녜스 자매를 어르기도 하고 별별 약속을 다하며 배교시키려 하였으나 얻은 것은 거절뿐이었다. 이에 포장은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니 효주 아녜스는 9월 3일에 순교한 6명의 신자 중에서 가장 악독하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신자들은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 포졸들과 관원들이 분통을 터트리기도 하였지만, 효주 아녜스는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침묵 속에서 기도를 드리며 마음속으로 우리 구세주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포장은 이와 같이 훌륭한 항구심이 어떤 마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하여 등에 몇 가지 주문을 쓰게 하고, 불에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그 글자들을 열세 군데나 뚫게 하였지만, 이러한 형벌에도 그녀는 전혀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 포졸들은 효주 아녜스를 끄집어내어 학춤형을 가하며 온갖 비웃음과 욕설을 퍼부었지만, 효주 아녜스는 용기를 내어 그 괴로움을 달게 참으며 굳게 마음을 가졌고, 더욱더 열심히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 바치며 묵묵히 참아 받았다. 이러한 형벌을 가한 후, 포장은 옷을 벗긴 채로 그녀를 죄수들의 감방에 들여보내 갖은 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정녀들의 천상배필이 그녀를 구원하러 오셔서 초인적인 힘을 넣어주어 한 사람이 남자 열 사람을 능가할 만큼 힘을 강하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눌려 마침내는 옷을 돌려주고 그녀를 여자 감방으로 데려갔다.
5월 9일 효주 아녜스는 언니인 효임 콜룸바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고, 5월 12일에는 형조판서 앞에 출두해서 그동안 감옥에서 당한 여자로서의 모욕을 호소하자, 형조판서는 이 같은 처사를 저지른 포장과 포졸들을 처벌하였다.
그 다음부터 여교우들은 악형보다도 더 괴로운 그와 같은 모욕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효주 아녜스는 언니 효임 콜룸바보다 먼저 순교의 칼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39년 9월 3일이요 나이는 24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녜스
- 세례명 축일
11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Agnes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97/8-1253년 아시시
아녜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그네스, 아네스.
아녜스 이야기
성녀 아녜스는 1197년 또는 1198년에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귀족 출신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의 딸로 태어나 카테리나(Caterina)라는 이름을 얻은 듯하다.
그녀의 언니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가족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 생활을 시작한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이다.
성녀 클라라는 1212년 3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다.
그로부터 16일 뒤에 성녀 아녜스 또한 불과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와 언니가 머물고 있던 산 안젤로 디 판초(San Angelo di Panzo) 성당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성녀 클라라가 수도 생활에 들어간 후 집안 단속이 더 심해졌지만, 수도 생활을 향한 성녀 아녜스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두 딸을 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그녀의 아버지는 강제로라도 성녀 아녜스를 데려오려고 몇몇 친척을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강제로 그녀를 끌고 가려 했지만, 성녀 아녜스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버티어냈다. 결국 하느님의 힘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고 느낀 친척들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에게 수도복을 받으며 아녜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언니와 몇 명의 자매들과 함께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공동생활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클라라 수도회로 불리게 된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성녀 아녜스는 1219년 성 프란치스코가 세운 피렌체(Firenze) 근교 몬티첼리(Monticelli)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언니와 함께 생활하던 산 다미아노 모원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성녀 아녜스는 만투아(Mantua), 베네치아(Venezia), 파도바(Padova) 등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언니를 도와 클라라 수도회의 청빈 정신을 고수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덕이 있는 사람으로서 늘 친절하게 자매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1253년 성녀 아녜스는 중병으로 병상에 누운 성녀 클라라를 간호하기 위해 아시시로 돌아왔다. 8월 11일 성녀 클라라의 임종을 지킨 성녀 아녜스는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 16일 언니를 뒤따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시신은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그녀의 묘소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1753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는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로마 순교록은 그녀의 선종일인 11월 16일에 축일을 기념하는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11월 19일로 옮겨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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