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날짜 찾기

7월 13일 남자세례명 8가지

피어나네 2023. 8. 11. 08:00
반응형

 

7월 13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세라피온, 실라스, 에우제니오, 에즈라, 요엘, 토마스 턴스털, 투리아보, 헨리코 2세, 총 8분 목록이에요.

 

7월 13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7월 13일 여자세례명 데레사(예수의), 미로페, 밀드레다, 클렐리아 바르비에리, 총 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1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8가지

 

 

 

 

7월 13일 남자세례명 목록

 

  1. 세라피온

  2. 실라스

  3. 에우제니오

  4. 에즈라

  5. 요엘

  6. 토마스 턴스털

  7. 투리아보

  8. 헨리코 2세

 

7월 13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8가지

 

 

1. 세라피온

 

  • 가톨릭 성인 이름
    Serapi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5년

 

 

세라피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라피언, 쎄라피온.

 

 

세라피온 자료

성 세라피온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통치 초기에 마케도니아(Macedoni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실라스

 

  • 가톨릭 성인 이름
    Sil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실라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실라스, 실바노, 실바누스, 씰라스, 씰바노, 씰바누스.

 

 

실라스 자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성 실라스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 공동체로 진출하기 위해 사도 바오로(Paulus, 6월 29일)와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와 함께 시리아로 파견되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마르코(Marcus, 9월 27일)라는 요한 문제로 언쟁했을 때, 그는 바오로를 수행하여 그의 제2차 전교 여행지인 시리아(Syria), 실리시아(Cilicia) 그리고 마케도니아(Macedonia)를 순회하였다(사도 15,38-40).

성 실라스는 필립비(Philippi)에서 사도 바오로와 함께 고발되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사도 16,19 이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는 유대인들의 폭동에 직면하였으나 교우들이 그날 밤으로 베레아(Berea)로 떠나게 주선해 주었다(사도 17,5-10).

사도 바오로가 실바누스(Silvanus)라고 언급한 사람(2코린 1,19)은 실라스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또한 1베드로 5장 12절에 언급된 실바누스라는 인물 역시 사도 바오로가 알던 실라스와 동인 인물로 여겨진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코린토스(Corinthos) 교회의 초대주교였고 마케도니아에서 운명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에우제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ge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05년 카르타고

 

 

에우제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에우제니오 자료

카르타고 태생인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는 학덕과 성덕, 애덕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반달족(Vandals)의 왕 후네릭이 승인하는 선거에서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임되었는데, 이곳은 거의 50년 동안 주교좌가 공석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통치자이며 아리우스파(Arianism)이던 후네릭은 그의 주교직 수행을 금지시키고, 가톨릭 박해를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반달족의 가톨릭 개종을 법으로 금하였다. 

또 그는 주교회의를 개최토록 명하였는데, 에우게니우스는 아리우스파 주교들을 등용하려는 국왕의 음모를 미리 알고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다. 가톨릭과 아리우스파간의 관계를 토의한다는 명목으로 열린 이 회의는 484년에 개최되었다.

이때 왕은 가톨릭 교회들의 약탈을 중지시켰으나, 수많은 가톨릭 주교들을 추방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에우게니우스도 포함되었다. 그는 트리폴리(Tripoli)의 사막으로 쫓겨 갔는데, 이곳의 아리우스파 주교인 안토니우스(Antonius)는 그를 아주 가혹하게 대하였다.

484년에 후네릭이 죽자 그의 조카이며 계승자인 곤타문드가 그의 귀향을 허락하였고, 가톨릭 교회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트라시문드는 박해를 재개하여 에우게니우스에게 사형을 선교하였으나 죽이는 대신 그를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유배를 보냈다. 그는 이곳의 알비(Albi) 교외의 어느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에즈라

 

  • 가톨릭 성인 이름
    Ezr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5세기BC

 

 

에즈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스드라스.

 

 

에즈라 자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성문서에,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역사서에 속하는 구약성경 에즈라서는 후반부(7-10장)에 가서 등장하는 주인공 에즈라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다. 에즈라서는 느헤미야서와 함께 바빌론 귀양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도움이라는 뜻을 지닌 성 에즈라(Esdras)는 바빌론으로 귀양 간 유다인들의 사제이자 율법 학자로서 페르시아 정부의 유다인 담당 기구 안에서 조언자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제7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다인의 공동체를 다시 이룩할 명령을 받았다. 약 1,500명의 유다인과 많은 성전 봉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해(7장 이하) 법을 선포하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킬 것을 명하며 타민족과의 혼인을 금지하였다(9장 이하).

이는 많은 동포가 이민족들과 혼인하여 민족의 순수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페르시아로 돌아갔으리라고 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요엘

 

  • 가톨릭 성인 이름
    Joe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BC

 

 

요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조엘.

 

 

요엘 자료

요엘서는 구약성서의 열두 소예언서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예언서로 브두엘의 아들 요엘(1,1)이 선포한 말씀으로 모아져 있다. 

요엘은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을 지니며 역대기와 느헤미야서와 에즈라서 등 구약성서 후대의 역대기계 문헌에는 18회나 언급되지만, 그 외에는 사무엘 예언자의 맏아들 이름으로 단 한 번만 사용된다(1사무 8,1). 그래서 요엘이 오래된 이름이기는 하지만 구약성서의 후대에 와서 흔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구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요엘 예언자가 언급되지 않는다. 요엘서 자체에서도 요엘 예언자 개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데 요엘의 예언이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가 유대인이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요엘은 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 의식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이사야나 에제키엘처럼 이스라엘인들의 잘못된 종교 의식을 비판하였던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가뭄과 메뚜기 떼의 침입으로 성전에서 매일 바쳐야 하는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여러 외적 궁핍보다 더 큰 불행으로 여긴다(1,9. 13. 16). 또한 그의 많은 표현도 전례 용어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직하던 ‘전례 예언자’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다른 한편, 기존의 성서에 정통한 요엘은 선배 예언자들의 사상을 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공포한 말씀을 다시 선포하고 그들의 어구나 어휘를 인용하고 재활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예언자를 ‘성서 예언자’ 또는 ‘성서 해설가’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예언자로서 요엘의 성격을 흐리게 하거나, 그의 독창성을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여러 정황을 종합할 때, 기원전 4세기 초엽이 요엘 예언자의 시대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유대인들은 민족과 땅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감행한 종교개혁 덕분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일한 성소로 자리를 굳히고, 그곳의 모든 전례도 이미 잘 정비되어 거행되고 있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토마스 턴스털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Tunstal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6년 영국

 

 

토마스 턴스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턴스탈, 턴스톨, 토머스, 툰스톨.

 

 

토마스 턴스털 자료

토마스 턴스털은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웨스트모얼랜드(Westmoreland)의 켄달(Kendal) 교외 윈펠(Whinfell) 태생으로 그의 부모나 출생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1606년 프랑스 북부 두에(Douai)로 가서 영국 대학에 입학해 사제직을 준비했다. 1609년 아라스(Arras)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1610년 8월 17일 사제로서 영국 선교를 위해 두에를 떠났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체포되어 거의 5년 정도 여러 감옥을 전전해야 했다. 

한번은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위즈비치 성(Wisbech Castle)에서 탈출에 성공해서 킹스린(King’s Lynn)에 있던 친구 집에 피신했으나 탈출 중에 다친 손을 치료하기 위해 도움을 구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노리치(Norwich)의 감옥에 갇혔고, 1616년 7월 12일 가톨릭 사제로서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7월 13일 노리치에서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이런 기도를 바쳤다. 

“이제 만찬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오늘 나 같은 미물을 천상의 식탁으로 초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토마스 턴스털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7월 13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토마스 턴스털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투리아보

 

  • 가톨릭 성인 이름
    Turia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50년 돌

 

 

투리아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뚜리아보, 뚜리아부스, 투리아부스, 투리아브, 투리아프.

 

 

투리아보 자료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성 투리아부스(Turiavus, 또는 투리아보)는 그 지방 돌의 주교인 성 삼손(Samson, 7월 28일)에게 사제서품을 받았고, 후에 그를 계승하여 돌의 주교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헨리코 2세

 

  • 가톨릭 성인 이름
    Henry I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황제

  • 활동 연도와 지역
    973-1024년

 

 

헨리코 2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앙리, 하인리히, 헨리,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쿠스.

 

 

헨리코 2세 자료

성 헨리쿠스(Henricus, 또는 헨리코)는 973년 5월 6일 바이에른(Bayern) 또는 힐데스하임(Hildesheim)에서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와 부르고뉴(Burgogne)의 왕인 콘라트(Conrad)의 딸 기셀라(Gisel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라이징(Freising)의 아브라함 주교에게 교육을 받다가 힐데스하임의 주교좌성당 학교를 졸업하고 바이에른으로 가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 볼프강(Wolfgang, 10월 31일) 주교의 제자가 되었다. 

995년에 사망한 부친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Bayern)의 공작 하인리히 4세가 되었고, 998년에는 룩셈부르크(Luxembourg)의 여백작인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3월 3일)와 결혼하였다. 

결혼 첫날밤에 성녀 쿠네군다는 남편에게 정결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기 위해 동정을 지키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남편인 성 헨리쿠스 또한 평소 그러한 희망이 있었다며 일생 남매처럼 지내되 세상에는 알리지 말자며 동정서원을 발했다.

성 헨리쿠스가 황제에 오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1002년 1월 23일 오토 3세가 이탈리아의 비테르보(Viterbo)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세 명의 후보자가 독일의 왕권을 차지하고자 했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그해 6월 독일 마인츠(Mainz)에서 소수의 귀족과 교회의 도움으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마인츠의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 대주교에게 도유를 받고 왕위에 올랐으나 실질적으로 최종 승인을 얻기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그 후 1014년 2월 14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8세(Benedictus VIII)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올렸다. 그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는 독일 성직계의 강화와 교회의 개혁과 쇄신이었다.

성 헨리쿠스는 성녀 쿠네군다와의 혼인 중에 동정을 지켜 ‘요셉의 결혼’이라는 전설이 나올 만큼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스승은 성 볼프강이었고, 클뤼니(Cluny) 수도원의 기틀을 마련한 성 오딜로(Odilo, 1월 1일)와 복자 리카르두스(Richardus, 6월 14일)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젊어서 사제직에 관심이 있었고, 결혼 후에도 수도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자신의 직책상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신심은 수도자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1007년 밤베르크(Bamberg) 교구를 설정하고, 그곳을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1024년 7월 13일 괴팅겐(Gottingen) 근처의 그로나(Grona)에서 세상을 떠나 밤베르크의 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헨리쿠스 2세는 11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중세 독일의 왕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왕이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날짜순 천주교 세례명

어떤 세례명이 좋을까?

pieonane.com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

 

이름순 가톨릭 세례명

본받고 싶은 가톨릭 성인 찾기

pieonane.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