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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여자세례명 4가지

피어나네 2023. 9. 1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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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베아트릭스, 요안나 들라누, 율리아나, 클라라, 총 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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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남자세례명 드리텔모, 로가토, 루스티코, 리베라토, 마마, 막시모, 미론, 바오로, 보니파시오, 세르보, 셉티모, 아나스타시오, 에우세비오, 히야친토, 총 1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8월 17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14가지

 

 

 

 

8월 17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베아트릭스

  2. 요안나 들라누

  3. 율리아나

  4. 클라라

 

8월 17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1. 베아트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Beatric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24-1492년 실바

 

 

베아트릭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아뜨리스, 베아뜨리체, 베아뜨릭스,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체.

 

 

베아트릭스 자료

성녀 베아트릭스(Beatrix, 또는 베아트리체)는 1424년경 포르투갈 중동부 캄푸마이오르(Campo Maior)에서 시장인 아버지 루이 고메스 다 실바(Rui Gomes da Silva)와 빌라헤알(Vila Real) 백작의 딸인 어머니 이사벨 데 메네세스(Isabel de Meneses)의 딸로 태어나 베아트리스 데 메네세스 다 실바(Beatriz de Menezes da Silva)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또한 신비주의자이자 개혁 프란치스코회의 창시자인 아메데우스(Amedeus da Silva)의 동생이다. 포르투갈의 가톨릭 귀족 가문 출신인 성녀 베아트릭스는 어려서부터 궁정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이사벨(Isabel) 공주의 시녀로 있다가 공주가 카스티야(Castilla)의 주앙 2세(Joao II)와 결혼할 때 에스파냐로 함께 수행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성녀 베아트릭스의 미모가 공주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하여 어이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3일 동안 투옥되었는데, 이때 음식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좁은 감옥에서 성녀 베아트릭스는 동정 마리아의 발현을 경험했다고 한다.

거의 죽다 살아난 후 성녀 베아트릭스는 궁중 생활에 환멸을 느껴 톨레도(Toledo)로 가서 산토 도밍고 엘 레알(Santo Domingo el Real)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당시 귀족들의 관습대로 수도 서원은 하지 않고 두 명의 하인과 함께 수녀원에 머물렀다. 

그녀는 공동체 생활에 대한 의무는 없었지만, 당시 개혁 시토회의 규칙을 따르던 수도원의 모든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며 30년 이상을 살았다. 

그녀는 성모 발현을 체험한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여자 수도회 설립을 꿈꾸어 오다가, 1484년경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를 질투했던 포르투갈의 이사벨 여왕의 딸이자 가톨릭 신자인 이사벨 여왕은 성녀 베아트릭스의 거룩함에 감동해 그녀에게 큰 애정을 지녔고, 톨레도에 갈 때마다 그녀를 찾았었다. 

그리고 성녀 베아트릭스가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자, 그 수도회의 첫 공동체가 사용하도록 톨레도에 있는 갈리아나(Galliana) 성(城)을 기증하였다.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시토회의 규칙을 따랐고, 수녀들은 푸른 외투를 두르고 그 안에 흰 수도복을 입었다. 그리고 148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Innocentius VIII)에게 수도원 회칙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성녀 베아트릭스는 1490년에서 1492년 사이에 톨레도의 수도원에서 선종해 그곳 성당에 묻혔는데, 정확한 선종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가 완전히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설립자가 선종하면서 이 새로운 수녀회는 톨레도의 대주교이며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원인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Francisco Jimenez de Cisneros) 추기경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성녀 베아트릭스가 오랜 세월 지냈던 산토 도밍고 엘 레알 수도원과 통합하여 클라라회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새 수녀회를 승인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수녀회’로 제자리를 찾은 수녀회는 곧바로 인근 여러 지역과 유럽과 남미의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성녀 베아트릭스는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6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의 축일은 수녀원과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오랫동안 9월 1일에 기념하고 있고, 나라에 따라서 8월 16일 또는 17일에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7일 목록에서 그녀가 귀족 여성으로서 완전한 삶을 열망해 궁중 생활을 떠나 도미니코회 수녀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기념하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고 1490년에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요안나 들라누

 

  • 가톨릭 성인 이름
    Jeanne Delanou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666-1736년

 

 

요안나 들라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들라누 자료

성녀 요안나 들라누(Joanna Delanoue)는 1666년 6월 18일 프랑스 앙주(Anjou) 지방 사뮈르(Samur)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종교용품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열두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169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어머니의 사업을 이어받아 현명하고 성실하게 운영해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1698년 성령 강림 대축일 주간에 그녀는 인간의 삶과 일의 가치에 대한 두 개의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하나는 환시 체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렌(Rennes)에서 순례를 떠난 과부 프란체스카 수쉐(Francesca Souchet)의 신심 깊은 권고의 말이었다. 

이 두 사건은 그녀의 사고방식을 바꿔 자신의 안위에만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보다 영적인 수준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잘 나가던 상점 문을 닫고 세상의 안락함과 성공이 아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별히 사뮈르 지역의 고아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마침 그녀의 선행에 감동한 사람들이 세 채의 집을 기증하자 이를 가난한 고아들의 안식처로 만들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자선활동에 동참하면서 작은 모임이 형성되자 그녀는 1704년 ‘사뮈르의 하느님 섭리의 성녀 안나 수녀회’(Sisters of St. Anne Providence of Samur)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수도명을 ‘십자가의 요안나’(Jeanne of the Cross)로 정하였다.

성녀 요안나 들라누는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1721년 무렵에는 그녀와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가 이미 프랑스 전역에 많은 고아원과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고행과 기도 속에 늘 헌신적으로 자선활동을 벌이던 그녀는 1736년 8월 17일 프랑스의 팡세(Fencet)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947년 11월 8일 교황 비오 12(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율리아나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0년경

 

 

율리아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자료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남매 사이인 성 바오로(Paulus)와 성녀 율리아나는 270년경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될 무렵 페니키아(Phoenicia) 연안의 항구도시인 팔레스티나(Palestina)의 프톨레마이스(Ptolema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비록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한 번은 프톨레마이스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스스로 십자가의 상징을 지니고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성 바오로를 만났다. 

황제는 즉시 그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다음날 재판관이 심문할 때, 성 바오로는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그로 인해 그는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성 바오로가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본 성녀 율리아나는 모든 사람 앞에서 황제의 불의와 잔혹함에 대해 고발했다. 그래서 그녀 또한 체포되어 같은 방법으로 고문을 받았다. 거룩한 남매는 무수히 매를 맞고 날카로운 쇠 갈고리로 온몸이 찢기고 뜨겁게 달군 쇠로 지지는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문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거룩한 남매의 고백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을 고문하던 세 명은 군인들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남매에게 충격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세 명의 군인들, 즉 콰드라투스(Quadratus)와 아카키우스(Acacius)와 스트라토니쿠스(Stratonicus)는 그 즉시 처형되었다.

성녀 율리아나를 고문하던 사람이 한 번은 만약 그리스도를 배반하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약속으로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녀 율리아나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변함없는 마음을 유지했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녀 율리아나를 더럽히기 위해 평판이 안 좋은 집으로 보냈지만, 그곳에서도 그녀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황제는 거룩한 남매를 화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군중들이 몰려들어 고통받는 순교자들을 보며 점점 크게 웅성거리자 즉시 참수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거룩한 남매는 웃는 얼굴로 처형장에 들어서며 하느님을 찬양했다. 성 바오로와 성녀 율리아나의 순교 이야기는 다소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지만,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둘러싼 열주(列柱) 위를 장식한 140명의 성인 중 일원으로 포함되어 공경을 받아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클라라

 

  • 가톨릭 성인 이름
    Clar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268-1308년 몬테팔코

 

 

클라라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클라라 자료

프란치스코회과 아우구스티니아노회 사이에는 이탈리아 스폴레토(Spoleto) 교구의 몬테팔코에서 태어난 성녀 클라라(Clara) 수녀가 서로 자기 수도회의 성녀라는 주장이 오랫동안 있었다. 

그 이유는 성녀 클라라가 요안나(Joanna)의 지도를 받으면서 15년 동안 은둔소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곧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스폴레토의 주교에게 정규 수도원 생활을 간청하여 허가를 받을 때, 그 주교가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회칙을 주었다. 이들의 은둔소는 1290년에 수도원으로 세워졌고, 요안나가 죽고 난 뒤에 성녀 클라라는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의 생활은 그 엄격성과 높은 덕으로 유명하다. 하루의 대부분은 침묵으로 지냈고, 눈이 오더라도 맨발로 다녔으며, 하루에 주님의 기도를 백 번씩 바쳤다고 한다. 그녀의 말과 표양은 공동체가 완덕을 지향하는데 큰 격려가 되었고, 하느님과의 일치는 관상생활의 모범이 되었다.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자주 탈혼에 빠졌으며, 수도원의 재산을 수도원 밖의 사람들도 이용하도록 배려하는 등 획기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성녀 클라라는 우리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다.

그 때문에 성녀의 몸에 십자가의 형상이 인각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그녀는 1737년에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81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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