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노텔름, 루포, 리카르도 그윈, 마리아노, 발타사르, 빅토르 (주교), 빅토르 (순교자), 알렉산데르, 에텔레드, 에텔베르트, 요한, 이냐시오, 조시모, 플로렌시오, 헤론, 호세아, 총 16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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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1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10월 17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노텔름
- 가톨릭 성인 이름
Nothel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40년 캔터베리
노텔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노뗄름.
노텔름 자료
영국 런던(London)의 사제인 성 노텔름은 734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역사가 성 베다(Beda)는 자신의 교회사 서문에서 이 성인의 공적을 치하하였으나 그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포
- 가톨릭 성인 이름
Ruf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7년경
루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뽀, 루뿌스, 루퍼스, 루포스, 루푸스.
루포 자료
성 루푸스(또는 루포)와 성 조시무스(Zosimus)는 일찍이 사도들의 제자가 되어 안티오키아(Antiochia) 교회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안티오키아의 주교인 성 이냐시오(Ignatius)가 순교를 위해 로마로 압송되는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아시아의 스미르나(Smyrna)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주교는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였다. 성 이냐시오 주교는 개인적 친분이 있던 성 폴리카르푸스에게 편지를 보내 사목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덕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런데 성 폴리카르푸스는 필리피(Philippi) 교회에 보낸 편지와 다른 기록에서 성 이냐시오 주교뿐만 아니라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성 폴리카르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는 스미르나를 떠나 고대 마케도니아의 필리피를 지나 로마로 갔다. 그 여정 중에 그들은 소아시아 지방에 신앙을 전파하고, 순교하기 전까지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 이냐시오 주교의 쇠사슬을 함께 짊어졌다고 했다.
그들은 또한 현세를 사랑하기보다 그들과 모든 이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사랑했다고 적었다.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는 107년경 로마에 도착해서 성 이냐시오 주교가 순교하기 이틀 전인 12월 18일,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져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들이 순교한 날인 12월 18일 목록에서 그들을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동방 정교회도 같은 날에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이냐시오 주교의 순교와 연결된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 순교자를 그와 함께 10월 17일에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는 성 이냐시오 주교와 함께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광장을 둘러싼 주랑 위에 있는 140명의 성인상에 포함된 순교자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리카르도 그윈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Gwy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37?-1584년 영국
리카르도 그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그윈 자료
성 리카르두스 그윈(Richardus Gwyn, 또는 리카르도 그윈)은 1537년경 영국 웨일스 지방의 몽고메리셔(Montgomeryshire)에서 태어나 프로테스탄트 신자로 성장했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20살에 옥스퍼드(Oxford) 대학에서 잠시 공부한 뒤에 케임브리지(Cambridge)의 성 요한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562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렉섬(Wrexham)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개인적으로 공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캐서린(Catherine)과 결혼해서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우연히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부터 고향을 떠났으나 1579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다행히 탈옥에 성공해 1년 반 정도를 도망자 신분으로 살았으나 다시 체포되어 4년 동안 감옥을 전전했다. 결국 그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584년 10월 15일 렉섬에서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리카르두스 그윈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10월 17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한편 웨일스 지방에서는 5월 4일 외에도 기존의 10월 25일을 ‘웨일스의 6위 순교성인’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로 유지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i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마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리아누스.
마리아노 자료
성 빅토르(Victor)와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그리고 성 마리아누스(또는 마리아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발타사르
- 가톨릭 성인 이름
Balthasa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492년 치아바리
발타사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타살.
발타사르 자료
발타사르는 1420년경에 이탈리아 제노바(Genova)의 치아바리에서 태어났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서원하고 서품을 받았다. 그는 펠트르(Feltre)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와 친구이자 동료 설교자였다. 베르나르디누스와의 선교여행은 거의 항상 성공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오래 지속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주로 고해신부로 일하였고, 열심히 미사를 봉헌하여 큰 감명을 주었다. 또한 그는 자주 숲 속으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명상에 잠기거나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종종 성모의 환시를 보았고, 폭설이 쏟아질 때 기적적으로 피난처를 구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온다. 발타사르는 1492년 10월 7일에 운명하였고, 1930년에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빅토르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54년 카푸아
빅토르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주교) 자료
성 빅토르는 541년 이탈리아 카푸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신학자로서 몇 권의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빅토르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빅토르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순교자) 자료
성 빅토르와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그리고 성 마리아누스(Marian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알렉산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알렉산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자료
성 빅토르(Victor)와 성 알렉산데르 그리고 성 마리아누스(Marian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에텔레드
- 가톨릭 성인 이름
Ethelre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70년경 켄트
에텔레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뗄레도, 에뗄레두스, 에텔레도, 에텔레두스.
에텔레드 자료
이날은 성 에텔베르트(Ethelbert)와 성 에텔레드의 유해를 이장한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들은 켄트의 왕 에르멘레드(Ermenred)의 아들이자 위대한 성왕 에텔베르트(Ethelbert, 2월 26일)의 손자이다. 그들은 당시 켄트의 섭정을 맡았던 에그베르트(Egbert) 왕에 의해서 이스트리(Eastry)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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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베르트 왕은 그들을 암살한 책임을 통감하고 참회하는 뜻으로 민스터(Minster)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살해된 두 왕자의 자매인 성녀 에르멘부르가(Ermenburga, 11월 19일)는 그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기초를 놓았다.
그들의 유해를 두고 에식스(Essex)의 워커링(Wakering)으로 옮기려는 경쟁이 있었으나, 결국은 10세기에 성 오스왈두스(Oswaldus, 2월 28일)에 의해 그들의 유해는 헌팅던셔(Huntingdonshire)의 램지(Ramsey) 수도원에 안치되어 그곳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들은 에텔베르투스(Ethelbertus)와 에텔레두스(Ethelred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에텔베르트
- 가톨릭 성인 이름
Ethel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70년경 켄트
에텔베르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뗄베르또, 에뗄베르뚜스, 에텔베르또, 에텔베르뚜스, 에텔베르토, 에텔베르투스.
에텔베르트 자료
이날은 성 에텔베르트와 성 에텔레드(Ethelred)의 유해를 이장한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들은 켄트의 왕 에르멘레드(Ermenred)의 아들이자 위대한 성왕 에텔베르트(Ethelbert, 2월 26일)의 손자이다.
그들은 당시 켄트의 섭정을 맡았던 에그베르트(Egbert) 왕에 의해서 이스트리(Eastry)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에그베르트 왕은 그들을 암살한 책임을 통감하고 참회하는 뜻으로 민스터(Minster)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살해된 두 왕자의 자매인 성녀 에르멘부르가(Ermenburga, 11월 19일)는 그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기초를 놓았다.
그들의 유해를 두고 에식스(Essex)의 워커링(Wakering)으로 옮기려는 경쟁이 있었으나, 결국은 10세기에 성 오스왈두스(Oswaldus, 2월 28일)에 의해 그들의 유해는 헌팅던셔(Huntingdonshire)의 램지(Ramsey) 수도원에 안치되어 그곳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들은 에텔베르투스(Ethelbertus)와 에텔레두스(Ethelred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이집트의 바스타(Basta) 태생인 성 요한 콜로부스(Joannes Colobus)는 젊어서부터 스케트 사막에서 혼자 살다가 성 포에멘(Poemen)의 제자가 되었다. 성 요한은 일생 동안 순종과 겸손 그리고 최대의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베르베르족(Berbers)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퀄줌(Quolzum) 산에 정착하여 여생을 지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이냐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Igna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교부 - 활동 연도와 지역
35?-107년경 안티오키아
이냐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냐시오 자료
초대교회의 사도 교부이자 순교자로서 일명 ‘테오포로스’(Theophoros,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란 뜻)라고 불리는 성 이냐시오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아마도 그는 시리아 출신인 듯하며,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였음이 분명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에 따르면, 그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가 세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도 성 베드로의 뒤를 이어 제2대 혹은 제3대 주교로 임명되고 축성되었다.
당시 안티오키아 교회는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곳이며(사도 11,26), 사도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이방인을 향한 선교 여행의 출발지이자 중심지였다. 특히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는 초대교회 안에서 로마 교회와 함께 교회를 떠받치고 있던 곳이 안티오키아 교회였다.
따라서 약 40여 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를 위해 헌신하던 성 이냐시오 주교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로마로 압송된다는 사실은 전 교회의 큰 슬픔이었다. 그는 10명의 군인에 의해 육로와 배를 이용해 소아시아 연안을 따라 그리스를 통과해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머무는 도시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몰래 찾아온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사도적 전통에 충실할 것을 설교하고 권고했다. 마케도니아의 네아폴리스(Neapolis)에 와서는 나중에 같이 순교하게 될 성 조시무스(Zosimus)와 성 루푸스(Rufus)와 합류하였다.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 중에 그는 모두 일곱 개의 편지를 썼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문헌학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그 내용이 풍부하고 가치가 높다. 특히 신학적으로 교회, 결혼, 삼위일체, 강생, 구속 그리고 성체성사에 관한 그의 교육적인 편지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저서 가운데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사적 문헌들이다.
성 이냐시오는 여섯 개의 편지는 교회 공동체에 그리고 한 개의 편지는 스미르나(Smyrna)의 주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에게 보냈다. 성 폴리카르푸스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선배 주교로서 후배 주교에게 사목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덕에 관해 설명하였다.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외에 다른 다섯 교회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고, 주교에게 순명하며,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를 일컬어 처음으로 ‘가톨릭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순교지로 가는 여정 중에 자신의 신앙과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전해주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순교와 성체성사를 긴밀히 연결하였다.
“나는 모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간다고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4,1-2)
또한 그는 같은 편지에서 순교의 고통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출산’으로 표현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순교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의 믿음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순교한 날을 ‘천상 탄일’(dies natalis)로 부르며, 순교한 날을 축일로 정하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스미르나, 트로아스, 네아폴리스, 브린디시 등을 거쳐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통해 로마로 압송된 성 이냐시오는 107년경 12월 20일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맹수형을 받고 사자의 밥이 되어 장렬히 순교했다. 그로써 그는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천상 탄일’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사자의 밥이 되어 맹수들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고자 했으나, 신자들이 남은 유해 일부를 모아 후에 안티오키아에 옮겨 안장했고, 7세기에 다시 로마로 옮겨 성 클레멘스(Clemens) 대성당에 모셨다.
옛 “로마 순교록”은 2월 1일 목록에서 안티오키아 교회의 제3대 주교인 성 이냐시오가 로마로 압송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사자의 이빨에 갈려 죽은 고통과 희생을 기념한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전례 개혁 이후 가톨릭교회는 그가 죄수의 몸으로 압송되어 로마에 도착한 10월 17일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0월 17일 목록에서 사도 성 요한의 제자로 사도 성 베드로 다음으로 안티오키아 교회의 제2대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이냐시오가 로마로 끌려가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동방 정교회는 성 이냐시오가 순교한 날인 12월 2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조시모
- 가톨릭 성인 이름
Zos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7년경
조시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소시모, 조시무스, 조씨모, 조씨무스.
조시모 자료
성 루푸스(Rufus)와 성 조시무스(또는 조시모)는 일찍이 사도들의 제자가 되어 안티오키아(Antiochia) 교회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안티오키아의 주교인 성 이냐시오(Ignatius)가 순교를 위해 로마로 압송되는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아시아의 스미르나(Smyrna)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주교는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였다. 성 이냐시오 주교는 개인적 친분이 있던 성 폴리카르푸스에게 편지를 보내 사목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덕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런데 성 폴리카르푸스는 필리피(Philippi) 교회에 보낸 편지와 다른 기록에서 성 이냐시오 주교뿐만 아니라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성 폴리카르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는 스미르나를 떠나 고대 마케도니아의 필리피를 지나 로마로 갔다. 그 여정 중에 그들은 소아시아 지방에 신앙을 전파하고, 순교하기 전까지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 이냐시오 주교의 쇠사슬을 함께 짊어졌다고 했다.
그들은 또한 현세를 사랑하기보다 그들과 모든 이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사랑했다고 적었다.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는 107년경 로마에 도착해서 성 이냐시오 주교가 순교하기 이틀 전인 12월 18일,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져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들이 순교한 날인 12월 18일 목록에서 그들을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동방 정교회도 같은 날에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이냐시오 주교의 순교와 연결된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 순교자를 그와 함께 10월 17일에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성 루푸스와 성 조시무스는 성 이냐시오 주교와 함께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광장을 둘러싼 주랑 위에 있는 140명의 성인상에 포함된 순교자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플로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Flor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26년 오랑주
플로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로렌시우스, 플로렌씨오, 플로렌씨우스, 플로렌티오, 플로렌티우스.
플로렌시오 자료
성 플로렌티우스(또는 플로렌시오)는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오랑주의 제8대 주교였다. 그는 수도원 학문의 후원자로 또 개인적인 성덕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당대의 이단들에 맞서 그의 교구를 지킨 목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헤론
- 가톨릭 성인 이름
Her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6년 안티오키아
헤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헤론 자료
성 헤론은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주교 성 이냐시오(Ignatius, 10월 17일)의 제자이자 후계자였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로서 순교하기 전까지 27년 동안 교구를 돌보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호세아
- 가톨릭 성인 이름
Hose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세기 BC
호세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오세아, 오지.
호세아 자료
구약성경 열두 소예언서의 하나인 호세아서는 예언자 성 호세아(라틴어 Osee)가 쓴 것이다. 히브리어인 호세아(hoshea)는 ‘구하다 · 돕다 · 해방하다’라는 뜻을 지닌 ‘야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주님의 구원’,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란 의미를 지닌다.
총 14장으로 이루어진 호세아서 1장 1절에 따르면, 그는 브에리(Beeri)의 아들로 남유다 임금 우찌야(기원전 781-740년) · 요탐(기원전 740-735년) · 아하즈(기원전 735-716년?) · 히즈키야(716-687년) 시대에,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 2세(기원전 787-747년) 시대에 하느님을 말씀을 받아 예언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국 출신으로 점점 더 정치와 종교의 부패가 극심해지는 시대적 아픔을 함께하며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예고한 비운의 예언자였다.
실제로 호세아 예언자의 활동 초기에는 북이스라엘이 번영하는 듯했으나 점점 쇠퇴해서 예로보암 2세 사후에 북이스라엘은 끊임없는 피와 배신의 쿠테타로 점철되었다. 호세아서가 사마리아의 멸망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예언자로서의 활동 시기는 대략 기원전 745-725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호세아 예언자의 생애에 대해 호세아서를 통한 것 외에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디블라임의 딸 고메르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식(첫째 아들 이즈르엘, 둘째 딸 로 루하마, 셋째 아들 로 암미)을 낳았다(1,2-9). 그런데 이 결혼도 글자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상징적 행동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 종교와 뒤섞여 바알 우상을 섬기는 등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자 심판이다. 또한 동족끼리 권력을 위해 서로 죽이고 강대국에 의존하는 기회주의적 정치 행태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예언자 호세아와 하까이(Haggai, 12월 16일)를 7월 4일에 기념한다고 간단히 기록했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호세아 예언자의 기념일을 정교회와 같은 10월 17일로 옮기고, 말로만이 아니라 자기의 삶으로써 불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을 보여주었다고 기록하였다.
호세아서의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고 ‘창녀’ 같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과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필요성과 백성을 용서하고 되찾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주 하느님의 노여움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분노이며, 이전의 잘못을 뉘우친 자식들이 당신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의 표현이다. 호세아는 자기의 혼인과 가정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남편을 배신하고 창녀가 된 아내를 저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 나선 호세아처럼, 이스라엘이 주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를 저질렀어도 주님은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부정한 아내라도 회개와 보속을 통해 새로 출발할 기회를 주실 만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3,3-5).
이렇듯 호세아서가 전해주는 호세아 예언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고 주님께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호세아서의 정신은 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에도 영향을 주었고, 신약성경에서도 곧잘 인용되고 있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15; 호세 11,1)>,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12,7; 호세 6,6)>,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루카 23,30; 호세 10,8)>,
<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로마 9,25-26; 호세 2,25; 2,1)>,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호세 13,14)>,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1베드 2,10; 호세 1,6.9; 2,1.3.25)>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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