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고데하르도, 그레고리오 첼리, 네포시아노, 로베르토 로렌스, 리카르도 레이놀즈, 미카엘 지드로익, 바울리노 (순교자), 바울리노 (주교), 베네리오, 사체르도스, 실바노,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요한 마르탱 모예, 요한 하일레, 요한 후톤, 치리아코, 쿠르코도모, 포르피리오, 플로리아노, 총 19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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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9가지
5월 4일 남자세례명 목록
- 고데하르도
- 그레고리오 첼리
- 네포시아노
- 로베르토 로렌스
- 리카르도 레이놀즈
- 미카엘 지드로익
- 바울리노 (숮교자)
- 바울리노 (주교)
- 베네리오
- 사체르도스
- 실바노
-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 요한 마르탱 모예
- 요한 하일레
- 요한 후톤
- 치리아코
- 쿠르코도모
- 포르피리오
- 플로리아노
1. 고데하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Godeh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960-1038년 힐데스하임
고데하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고데하르두스, 고타르도, 고타르두스, 고타르드.
고데하르도 자료
독일 바이에른(Bayern) 지방에서 태어난 성 고데하르두스(Godehardus, 또는 고데하르도)는 그의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니더 알타이흐(Nieder-Altaich) 수도원의 참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후에 참사회 의장이 되었다.
그는 990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베네딕토회 니더알타이크 수도원의 수도승이 되었다. 996년 수도원장이 된 그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수도원의 규율을 바로 잡았다.
이 사실을 높이 평가한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 황제는 그에게 다른 많은 수도원의 개혁작업을 맡겼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1022년 힐데스하임의 성 베른바르두스(Bernwardus, 11월 20일) 주교가 선종하자 그가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교구의 성직사회를 정화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주교좌 학교 건립에도 큰 기여를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만들어 구호사업에도 헌신하였다.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터널과 철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성 고데하르두스가 세운 여행자 숙박소가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타르두스(Gothardus)로도 불리는 그는 1131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그레고리오 첼리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Cell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343년 베루치오
그레고리오 첼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첼리 자료
이탈리아 리미니(Rimini) 교구의 베루치오에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 첼리(Gregorius Celli, 또는 그레고리오 첼리)는 15세 때에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성녀 모니카(Monica)에게 심취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0여 년 동안 수도원에 살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며 이단으로 기울어지던 많은 이들을 개종시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수도원을 세운 그레고리우스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 형제들이 그의 엄격한 생활과 명성을 시기하여 집안의 토지에 지은 수도원에서 그를 쫓아냈다.
그는 다행히 리에티(Rieti) 교외의 몬테 카르네리오(Monte Carnerio)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서 118세의 일기로 선종할 때까지 살았다. 그는 비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네포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Nepo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95년 알티노
네포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뽀씨아노, 네뽀씨아누스, 네포시아누스, 네포씨아노, 네포씨아누스, 네포티아노, 네포티아누스, 네포티안.
네포시아노 자료
성 네포티아누스(Nepotianus, 또는 네포시아노)는 원래 황제의 호위병 장교였으나 자신의 높은 지위를 포기한 후에 그의 삼촌인 이탈리아 알티노의 성 헬리오도루스(Heliodorus, 7월 3일)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성직자의 올바른 삶에 관한 논문을 써서 그에게 헌정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로베르토 로렌스
- 가톨릭 성인 이름
Robert Lawren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85?-1535년 영국
로베르토 로렌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오,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로베르토 로렌스 자료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Robertus Lawrence)는 1485년경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531년 카르투지오회에 가입한 후 성 요한 후톤(Joannes Houghton)에 뒤이어 잉글랜드 중북부 노팅엄셔(Nottinghamshire)에 있는 보베이(Beauvale)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1535년 2월 카르투지오회는 1534년에 헨리 8세(Henry VIII) 왕이 공포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영국 교회의 최고 수위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서약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래서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는 당시 런던(London) 수도원의 원장인 성 요한 후톤과 노스 링컨셔(North Lincolnshire)에 있는 악솔름(Axholme) 수도원의 원장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Augustine Webster)와 함께 서약에 대한 면제를 탄원하고자 당시 국왕의 신임 속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만나러 갔다가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1535년 4월 그들은 특별 위원회에 불려 나가 수장령을 거부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템스 강변의 아이슬워스(Isleworth) 본당 내에 있는 시온(Zion) 수도원의 원장인 브리지타 수도회(Bridgettines) 소속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Richardus Reynolds) 신부도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5월 4일,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는 같은 카르투지오회의 성 요한 후톤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 그리고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 신부와 아이슬워스 본당신부인 복자 요한 하일레(Joannes Haile)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와 동료 회원들은 영국에서 순교한 첫 카르투지오회 수도승들이다.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5월 4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리카르도 레이놀즈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Reynold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원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92?-1535년 영국
리카르도 레이놀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레이놀즈 자료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Richardus Reynolds, 또는 리카르도 레이놀즈)는 1492년경 잉글랜드 남서부 데번(Dev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교에서 수학할 때 코르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 뒤인 1513년에 학위를 취득하고 그 대학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템스 강변 아이슬워스(Isleworth)에 있는 시온(Zion) 수도원에 들어가 브리지타 수도회(Bridgettines)의 수도승이 되었다. 캔터베리 교구의 레지날드 폴(Reginald Pole, 1556-1558년 재임) 추기경이 말한 바에 따르면,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세 가지 언어에 정통한 유일한 영국 수도승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고, 많은 이들이 영적 상담과 조언을 청하고자 그를 찾았다.
1534년 헨리 8세(Henry VIII) 왕은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공포하면서 영국 교회의 최고 수위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는 1535년 4월 중순 무렵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그리고 특별위원회에 불려 나가 수장령을 거부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카르투지오회의 성 요한 후톤(Joannes Houghton),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Robertus Lawrence),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Augustine Webster)도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5월 4일,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는 세 명의 카르투지오회원과 아이슬워스 본당신부인 복자 요한 하일레(Joannes Haile)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5월 4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미카엘 지드로익
- 가톨릭 성인 이름
Michael Giedroyc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85년
미카엘 지드로익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이클, 미가엘, 미겔, 미구엘, 미키.
미카엘 지드로익 자료
리투아니아(Lithuania)의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 근교에서 어느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미카엘 지드로익은 머리는 크고 몸집이 작았을 뿐만 아니라 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어릴 때의 사고 때문에 다리까지 사용할 없게 되었다. 그는 건강 때문에 학업을 자주 중단하였다.
그러나 신심은 돈독하였으므로 어릴 때부터 그는 고행을 실천하고 말을 적게 했으며, 1주일에 4일은 단식하고 가능하면 숨은 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의 메트로 성모 수도원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지만 그의 거처와 성당 왕래만을 허용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도 그는 온종일 기도로 보냈고, 고기는 전혀 입에 대지도 않고 오로지 채소만 먹을 뿐이었다. 그의 고행은 극에 달한 듯하였고, 또 병중이거나 노령에도 조금도 완화하지 않았다.
이런 거룩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온갖 은혜를 허락하셨는데, 한 번은 성당의 십자가에서 내려주신 말씀을 듣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는 예언과 기적의 은혜까지 받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바울리노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쾰른
바울리노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바울리노 (순교자) 자료
성 바울리누스(또는 바울리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적지만, 그의 유해는 독일 쾰른에 안장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바울리노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26년 시니가글리아
바울리노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바울리노 (주교) 자료
성 바울리누스(또는 바울리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그가 주교라는 것과 현재 이탈리아 시니가글리아의 수호성인이라는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베네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en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09년 밀라노
베네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리우스.
베네리오 자료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이후 밀라노의 두 번째 주교인 성 베네리우스(또는 베네리오)는 원래 암브로시우스의 부제로 있다가 400년경에 성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 8월 16일)를 계승하였다.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 없지만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가 그의 유해를 밀라노 주교좌성당에 안치하였다.
성 베네리우스는 놀라(Nola)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 6월 22일), 보르도(Bordeaux)의 성 델피누스(Delphinus, 12월 24일), 아퀼레이아(Aquileia)의 성 크로마티우스(Chromatius, 12월 2일)와 우정을 나누었다.
아프리카 주교들이 401년의 카르타고(Carthago) 회의를 개최할 때, 교황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의 지지를 호소했고 또 주교 베네리우스에게도 같은 지지를 호소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사체르도스
- 가톨릭 성인 이름
Sacerdo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70-720년 리모주
사체르도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케르도스, 싸체르도스.
사체르도스 자료
성 사체르도스는 670년에 프랑스 페리고르(Prigord) 지방 사를라(Sarlat)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고, 주교가 되기 전에는 칼라브르(Calabre)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리모주의 주교로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실바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ilv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1년 가자
실바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실바누스, 씰바노, 씰바누스.
실바노 자료
성 실바누스(또는 실바노)는 이집트와 팔레스티나(Palestina)에서 온 41명의 신자 그룹의 지도자로 그의 순교에 대해서는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자세히 기록하였다.
성 실바누스는 가자의 주교로서 박해 때 팔레스티나 광산의 노동형을 선고받았으나 힘든 일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서 결국 다른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 가톨릭 성인 이름
Augustine Webs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35년 영국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자료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Augustinus Webster, 또는 아우구스티노 웹스터)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런던(London)의 신(Sheen) 수도원에서 카르투지오회 수도승이 되었다. 1531년에 그는 잉글랜드 링컨셔(Lincolnshire)의 악솔름(Axholme) 섬에 있는 멜우드의 성모 마리아(Our Lady of Melwood)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영국에서 종교 개혁과 관련해 대혼란이 벌어질 때 영국 내에는 10개의 카르투지오회 은수 수도원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을 보통 ‘차터하우스’(charterhouse)라고 불렀다.
이는 카르투지오회를 설립한 성 브루노(Bruno, 10월 6일)가 첫 은수 수도원을 세운 프랑스의 샤르트뢰즈(Chartreuse)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카르투지오회 수도승들은 가난과 엄격한 삶을 통해 대중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이는 헨리 8세(Henry VIII) 왕이 수도원을 해산하기로 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1535년 2월 카르투지오회는 1534년에 헨리 8세 왕이 공포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영국 교회의 최고 수위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서약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는 이 사태에 대해 런던 수도원의 성 요한 후톤(Joannes Houghton)과 상의하기 위해 보베이 수도원의 원장인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Robertus Lawrence)와 함께 런던으로 갔다.
이들 세 수도승은 신앙과 양심에 어긋나는 서약에 대한 면제를 탄원하고자 당시 국왕의 신임 속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만나러 갔다가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1535년 4월 그들은 특별 위원회에 불려 나가 수장령을 거부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템스 강변의 아이슬워스(Isleworth) 본당 내에 있는 시온(Zion) 수도원의 원장인 브리지타 수도회(Bridgettines) 소속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Richardus Reynolds) 신부도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5월 4일,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는 같은 카르투지오회의 성 요한 후톤과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 그리고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 신부와 아이슬워스 본당신부인 복자 요한 하일레(Joannes Haile)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와 동료 회원들은 영국에서 순교한 첫 카르투지오회 수도승들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5월 4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요한 마르탱 모예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Martin Moy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730-1793년
요한 마르탱 모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땡,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노, 마르티누스, 마틴,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마르탱 모예 자료
프랑스 로렌(Lorraine) 지방 태생의 요한 마르탱 모예(Joannes Martinus Moye)는 스트라스부르(Strasburg)의 예수회 대학교와 메스(Metz)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754년 메스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가난한 시골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고, 1767년 많은 어려움 중에도 천주 섭리의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같은 해에 생디에(Saint-Die) 신학교의 학장이 되었지만 선교사가 되고픈 열망에 결국 1769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773년에 중국 사천(四川) 교구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반복되는 위협과 투옥 중에도 끊임없이 신앙을 선포하였고, 천주 섭리 수녀회의 회칙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동정녀회’를 설립하여 병든 이들을 돌보고 자신들의 집에서 여자와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고된 노동과 질병으로 인해 그는 1784년에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로렌과 알자스(Alsace)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그는 프랑스 혁명 중에 추방되어 수녀회와 함께 오늘날 독일 지방인 트리어(Trier)로 이동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트리어를 포위했을 때 그 도시에는 장티푸스가 만연했고, 그와 그의 수녀회는 헌신적으로 병든 이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요한 마르탱 모예 신부 역시 같은 병에 걸려 선종하였다. 그는 1954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요한 하일레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Hail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35년 영국
요한 하일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하일리, 한스, 헤일, 헤일러, 후안.
요한 하일레 자료
요한 하일레(Joannes Haile)는 중장년의 교구 사제로 순교하기 전에 템스 강변의 아이슬워스(Isleworth) 본당의 신부로 활동했지만, 그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케임브리지(Cambridge)의 킹스 홀(King’s Hall)에서 연구원으로 교훈적 삶을 살았고, 1521년 8월 13일 아이슬워스 본당으로 부임하기 전까지는 에식스(Essex)의 첼름스퍼드(Chelmsford)에서 사목했다. 그는 1535년 3월에 헨리 8세(Henry VIII) 왕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 반대하는 설교로 인해 반역죄로 고발되면서 체포되었다.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던 그는 그해 4월에 특별 위원회에 불려 나가 수장령을 거부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는 이웃한 시온(Zion) 수도원의 원장인 브리지타 수도회(Bridgettines) 소속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Richardus Reynolds) 신부와 영국의 카르투지오회 수도승인 성 요한 후톤(Joannes Houghton) 신부 ·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Robertus Lawrence) 신부 ·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Augustine Webster)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5월 4일, 그들 모두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한 하일레는 헨리 8세 재임 중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자 수장령에 반대하다 순교한 첫 교구 사제였다.
요한 하일레는 1886년 12월 29일 영국의 종교 개혁기 중에 순교한 54위 순교자의 일원으로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 순교한 날인 5월 4일에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요한 하일레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요한 후톤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Hought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86?-1535년 영국
요한 후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후톤 자료
성 요한 후톤(Joannes Houghton)은 1486년경 잉글랜드 에식스(Essex)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에서 수학한 뒤 런던(London)에서 카르투지오회에 가입하였다. 언제 사제품을 받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1531년에 그는 잉글랜드 중북부 노팅엄셔(Nottinghamshire)에 있는 보베이(Beauvale) 수도 분원의 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런던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1535년 2월 카르투지오회는 1534년에 헨리 8세(Henry VIII) 왕이 공포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영국 교회의 최고 수위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서약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래서 성 요한 후톤은 당시 보베이 수도원의 원장인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Robertus Lawrence)와 노스 링컨셔(North Lincolnshire)에 있는 악솔름(Axholme) 수도원의 원장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Augustine Webster)와 함께 서약에 대한 면제를 탄원하고자 당시 국왕의 신임 속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만나러 갔다가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1535년 4월 그들은 특별 위원회에 불려 나가 수장령을 거부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템스 강변의 아이슬워스(Isleworth) 본당 내에 있는 시온(Zion) 수도원의 원장인 브리지타 수도회(Bridgettines) 소속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Richardus Reynolds) 신부도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5월 4일, 성 요한 후톤은 같은 카르투지오회의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 그리고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 신부와 아이슬워스 본당신부인 복자 요한 하일레(Joannes Haile)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사형 집행인이 성 요한 후톤의 심장을 제거하기 위해 가슴을 가를 때, 그는 “오, 예수님! 당신은 제 심장으로 무엇을 하시렵니까?”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성 요한 후톤과 동료 회원들은 영국에서 순교한 첫 카르투지오회 수도승들이다.
성 요한 후톤은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5월 4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치리아코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a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3년경/4세기경? 코나
치리아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귀리아코, 귀리아쿠스, 유다스, 치리아꼬, 치리아꾸스, 치리아쿠스, 퀴리아코, 퀴리아쿠스, 키리아코, 키리아쿠스.
치리아코 자료
성 키리아쿠스(또는 치리아코)는 전설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그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실존 인물임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다 퀴리아쿠스(Judas Cyriacus)라고 불렸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숨겨둔 곳을 성녀 헬레나(Helena, 8월 18일) 황후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어떤 경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세례를 받고 예루살렘(Jerusalem)의 주교가 되었으며,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안코나의 주교로서 운명했다고도 하고 또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그는 퀴리아쿠스(Quiriacus)로도 불린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성 키리아쿠스는 예루살렘의 주교 유다로, 133년경 그곳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쿠르코도모
- 가톨릭 성인 이름
Curcodo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오세르
쿠르코도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꾸르꼬도모, 꾸르꼬도무스, 쿠르코도무스.
쿠르코도모 자료
로마의 부제인 성 쿠르코도무스(또는 쿠르코도모)는 갈리아 지방 선교를 맡은 오세르의 초대 주교인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 5월 16일)를 수행하도록 교황에 의해 파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포르피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orphy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0년 카메리노
포르피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뽀르삐리오, 뽀르삐리우스, 포르피리, 포르피리오스, 포르피리우스.
포르피리오 자료
성 포르피리우스(Porphyrius, 또는 포르피리오)는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방 카메리노에서 주로 복음을 선포하다가 데키우스 황제 때 참수되었다. 그는 저작자가 의심스러운 성 베난티우스(Venantius, 5월 18일)의 전설에도 등장한다.
그는 교회미술에서 박사모를 쓰고, 가운을 걸치고, 책을 들고서 세례자 요한 성인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또한 성 베난티우스와 함께 사제로서 그려지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플로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Flor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로어흐
플로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로리아누스, 플로리안.
플로리아노 자료
성 플로리아누스(Florianus, 또는 플로리아노)는 250년경 로마 제국의 고대도시인 아일리움 켄티움(Aelium Cetium, 오늘날 오스트리아 북동부의 장크트푈텐 Sankt Polten)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한 후 군대에 들어가 로마 제국의 속주인 노리쿰(Noricum,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대부분과 슬로베니아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장교가 되었다.
8세기 말 또는 9세기 초에 기록된 순교록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로마에서 파견된 집정관 아퀼리누스(Aquilinus)는 대규모의 로마군이 주둔한 요새가 있었던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린츠(Linz) 근처 엔스 강(Enns R.)과 접한 라우리아쿰(Lauriacum, 오늘날 린츠 인근 도시인 엔스 교외의 로르흐)으로 와서 40명의 그리스도인을 체포했다.
다른 그리스도인을 색출하기 위해 모진 고문이 자행되는 동안 성 플로리아누스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용감하게 집정관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였다.
집정관은 즉시 성 플로리아누스를 체포하여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명령하고, 이를 거부하자 온갖 고문을 가하였다. 집정관은 그를 산 채로 불태우는 화형에 처하도록 했다.
성 플로리아누스는 “평생 불과 싸운 내가 이제 불꽃을 타고 하늘에 오르게 되었구나.”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그는 군인으로서 국경을 수비하는 임무 외에도 지원자를 모아 소방대를 창설하여 재난 방지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가 만든 소방대의 명성이 점점 퍼져나가 다른 도시에도 그와 비슷한 의용 소방대가 생겨나기도 했다.
성 플로리아누스의 소방대를 두려워한 집정관은 화형을 집행하는 대신 성인의 목에 맷돌을 매달아 엔스 강에 던져 익사시키도록 했다. 강물에 빠져 순교한 성 플로리아누스는 그로 인해 홍수나 물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청하는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의 시신은 발레리아(Valeria)라는 신심 깊은 여인에 의해 수습되어 로르흐 근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묻혔는데, 성 플로리아누스가 그 여인의 꿈에 나타나 자기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이 안장된 수도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했고, 그 마을은 성인의 이름을 따서 장크트 플로리안(Sankt Florian)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유해 일부는 1138년에 로마(Roma)로 옮겨졌고,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III)가 폴란드의 카시미르 2세(Casimir II) 왕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유해 일부를 크라쿠프(Krakuw)의 주교에게 보내주었다.
그 뒤로 성 플로리아누스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고, 점차 유럽 전역으로 그에 대한 공경이 퍼져나갔다.
그는 우수한 군인들을 뽑아 의용 소방대를 직접 조직해 화재와 재난으로부터 도시를 구한 이유로 소방관과 굴뚝 청소부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특히 예로부터 밀집된 건물 구조 때문에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던 유럽의 주요 도시에는 불을 끄고 있는 성 플로리아누스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플로리아누스는 보통 로마 군인으로서 머리에 투구를 쓰고, 한 손에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물통을 들어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으로 주로 표현된다. 또한 순교 장면과 관련해서 맷돌과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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